오늘 퇴근길도 썩 기분이 좋지 않다. 어제는 거래처 사장이 나의 속을 하루 종일 뒤집어 놓더니 오늘은 부서 내 직장 동료와 부서장이 내 속을 뒤집어 놓았다. 퇴근 후 직장 내 가장 친한 동료에게 한바탕 짜증을 쏟아냈지만 이틀 연속으로 쌓인 화가 사그라들지를 않는다. 저녁을 먹고 마지막 저녁 커피를 마시며 응어리진 속을 달래기 위해 게임도 하고 쇼츠도 보다가 오랜만에 채용 앱을 켜 보았다. 인증과 재 로그인을 거쳐 앱에 접속하고 한참을 이리저리 보다가 이전에 작성해 놓은 이력서를 열어 보았다.
입사 준비를 하는 사람들 모두 동일하겠지만 입사 준비의 꽃 이자 최종 결과물은 이력서와 자소서 쓰기 그리고 면접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나는 3개 중에 가장 어렵다고 느꼈던 것은 자소서였다. 이력서는 내 개인 정보를 쓰는 것이기 때문에 내용이 일관적이고 명확하다. 면접은 절반은 임기응변과 자신감이기에 그 회사에 대한 공부만 최대한 해 가면 승산이 있었다. 하지만 자소서는 그때그때마다 쓰는 항목도 제각각이고 써야 할 내용도 명확한 기준이 없이 애매모호한 경우가 많다.
이력서와 면접은 내가 탈락했을 때 문제가 무엇이었고 어떤 점을 고쳐서 다음을 준비해야 하는지 명확하게 파악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자소서는 탈락했을 때 어디가 문제이고 어떤 기준에 의해 떨어졌는지 명확하게 알려주는 사람이 없다. 그래서 다음을 위해서 어떤 부분을 수정해야 하는지 알 수 없는 경우가 너무 많다. 40의 고개를 넘어 내가 누군가를 심사해야 할 위치가 되었을 때 나를 포함하여 나의 윗사람들은 자소서까지 가지도 않고 이력서에서 대부분 당락을 결정하고는 했다. 그렇게 업무를 보고 나면 난 항상 지난 한여름처럼 정열적이던 20, 30대 겪었던 좌절의 아픔이 너무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20, 30대 시절 명확하고 단순 명료했던 이력서, 40이 되어 누군가를 평가하는 자리에서 생각해보면 이력서는 참 오묘한 점이 많은 것 같다. 멀리서 전체적인 작성 내용을 보면 상당히 심플하고 10분이면 채워 넣을 수 있을 것 같아 보인다. 하지만 막상 한 칸 한 칸 채워 넣기 시작하면 점점 생각이 많아지고 과거의 나를 돌이켜 보고 현재의 나를 생각하게 된다. 때로는 내가 걸어온 발자취에 자부심을 가지기도 하며 또 때로는 후회하기도 하고 자기 반성의 시간을 갖기도 한다. 단필에 이력서를 써 내려갔을 때 나의 모습과 그동안의 삶에 한없이 만족스럽지만 써야 할 내용을 찾지 못해 머리를 쥐어짜고 있을 때면 무한한 자괴감에 빠진다. 생각을 해 보면 항목 하나하나 신중하고 꼼꼼하게 써야 되는 것이기에 검토하는 입장에서는 조금의 허술함이나 소홀함이, 거짓됨이 있으면 탈락의 요인이 되는 것이 당연한 것 같기도 하다.
그렇게 이력서에 대한 여러 의미가 담겨 있고 나의 사회 생활 발자취를 담고 있는 이력서를 40이 되고 그 정상의 고개를 넘어오면서 최근 10년 가까운 시간 동안 한 번도 꺼내 보지는 않았던 것 같다. 이력서에 담긴 의미들을 생각하면 과거 나의 사회생활을 돌아보고 자기 성찰의 시간을 갖기 위해 열어봐야 하는 나의 이력서를 나는 꼭 뭔가 불만과 분노에 가득 찬 시점에 열어보는 것 같다. 그리고 오늘 또한 자기 반성의 도구가 아닌 나의 분노를 달래기 위한 도구로 이력서를 열어보고 말았다.
그렇게 펼쳐본 언제 썼는지 그 시기조차 가물가물한 나의 이력서, 조금은 민망하기도 하면서도 사회생활을 했던 지난 20년의 많은 기억들이 스쳐 지나가게 만들어 주었고, 많은 일을 겪었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해주었다. 중간중간 써 있는 이직과 보직 이동이라는 단어는 인내심 없고 극단적이었던 30대 시절에 대한 안타까움을 느끼게 함과 동시에 그 당시의 무모함, 도전심, 지금의 자리가 아니어도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용기가 그리워지기도 한다. 이력서 속 사이사이 보이는 시간의 틈은 새로운 분야에 도전하지 못하고 능력을 키우지 못했던 나의 나태함과 게으름을 보여 부끄럽게 만들어주었다.
나의 이력서는 아무것도 몰랐던 사회 초년생인 20대의 나에서 시작하여 인생의 반전, 새로운 도전을 꿈꾸는 나와 안정적이고 현재에 충실하고자 하는 나 사이에서 갈등하는 30대에서 멈춰 버리고 말았다. 이제는 사회에서 고인물, 꼰대라고 불려도 이상하지 않을 40대 중반, 너무 오래전에 멈춰 버려 40대가 사라진 나의 이력서를 바라보며 나는 잠시 불안에 빠진다. 정말 나는 괜찮은 것일까? 멈춰 버린 나의 이력서가 다시 새로운 내용으로 채워져 나갈 수 있을까? 난 다시 움직일 수 있을까? 나의 미래는 과연 현재 기록되어 있는 나의 이력보다 얼마나 더 길게 써 내려 갈 수 있을까? 멈춰버린 이력서는 채용 앱을 로그인했을 때 분노를 사라지게 하고 수많은 물음표와 두려움, 알 수 없는 여러 감정들이 뒤섞여 멍하니 천장만 바라보게 만들었다.
40의 고개를 등산하며 어쩌면 나는 40대 자체가 너무 고단하다는 이유만으로 나의 과거를 돌아보고 앞으로 나갈 방향을 고민하는 데 소홀했던 것은 아닌가 싶다. 항상 나를 반성하게 하고 새로운 미래를 계획하게 동기를 부여해 줬던 나의 이력서를 너무 오랫동안 단순한 감정 쓰레기통으로 사용했던 나를 다시 한번 반성하게 된다. 그리고 다시 한번, 조금이나마 나의 이력서에 나의 발자취를 남겨보고자 마음을 다잡아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