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주얼리 디자이너, 한국 웹 개발자, 호주 블루베리 피커로 살아남기
워킹 홀리데이를 떠나는 일명 워홀러들 사이에서 신청가능한 나이인 계란 한 판을 가득 채운 만 서른살의 워홀러들을 막차를 타고 떠나왔다고 얘기한다. 만 서른에 생업도 포기하고 오는 무책임한 사람이 있다고? 그게 바로 나고, 내 쉐어하우스 메이트인 J도 그렇고 시드니 게스트하우스에서 만난 D도 그렇다.
맞아. 생각보다 서른에 워홀을 떠나온 사람들은 꽤나 많다. 각자의 이유가 무엇이 되었든 우리는 이곳 호주. 뉴 사우스 웨일스로 한국의 시린 추위를, 그리고 딱딱하고 무자비한 사회를 피해 도망쳐왔다.
9월에 떠나와 이제 12월 막바지에 도달한 아직 햇병아리 워홀러인 나는 지금 내 선택에 후회하지 않느냐 라고 물어보면 아직도 (나혼자) 미어지게 사랑했던 전 남자친구와의 헤어짐에서 울다 웃다를 벗어나지 못했고, 안정적인 수입원도 없어서 한국에서 모아온 그리고 부모님이 조금씩 받은 잔고의 앞자리 수가 바뀌는 것을 지켜보고 있다.
# 워홀의 단점
1. 불안정한 수입원
2. 가족/친구/연인과의 인연
3. 끊임없는 미래에 대한 불안과 공포
그리고 새해가 일주일 앞으로 다가온 지금 내가 처해진 상황은 어떤가. 게스트하우스 윗 침대칸을 쓰던 동생 H와 호주 최대 한인사이트인 호주나라에서 매니져 J님과 컨택을 해 블루베리팜으로 이동을 결정한 건 시드니에 도착한 지 열흘째였다. 호주 워홀비자는 특이한 조건이 있어서 시골지역의 농장이나 공장과 같은 일손이 필요한 곳에서 88일을 충족한다면 두번째 워홀비자를 신청할 수 있다. 사실 개발자로 취업을 원해서 호주에 온 것이었기 때문에 나에게 필요한 비자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래 그렇게 됐다.
그래서? 일주일 7일. 비 주기에 따라 오전 8시에서 10시 사이쯤 썸머시즌에는 저녁 7시까지 매일 9~12시간 블루베리를 딴다. 작물 중 블루베리라는 놈이 가장 따기 쉬운 종에 속한다지만 한 버켓에 $4.5을 받으면서 따기에 블루베리 2.2kg는 어마무시한 양이다.
매일 쉐어하우스 메이트들과 간단한 아침식사 후, 7인승 테라칸에 구겨져 실려 블루베리팜에 도착한다. 블루베리 벨트를 착용 그리고 각자 6개 정도 빈 버켓을 챙긴 뒤 2인 1조로 한 로우(row)를 탄다. 이게 내 새로운 일상이 되었다. 블루베리팜에서는 정말 사람을 만난다. 나잇대도 다양하고 직업도 다양하다. 함께 로우를 타는 사람과 몇 시간을 마주보다보니 어쩌다 한 마디라도 걸게 되는데, 그러다 보면 함께 사는 쉐어메이트가 아니라도 이 사람의 인생관이라던지, 앞으로 살아가고 싶은 삶의 목표라던지 알게 된다. 나랑 열 살 차이나는 피부가 뽀얀 A는 대학진학을 포기하고 왔단다. 근데 하루에 40개씩 따는 진짜 대단한 아이다.
블루베리를 따는 것과 같은 반복적인 작업을 지속적으로 하다보면 MBTI에서 파워 N들은 세상 오만가지생각이 다 든다. 처음 일주일은 호주 최저 시급도 못맞추는 픽킹에 대한 고찰을 하다 2주째는 저조한 레코드를 보며 어떻게하면 잘 딸 수 있을까 연구를 한다. 3주째는 생각보다 시간이 잘 간다는 생각을 하다 벌써 3달째 머무르게 되었다.
# 워홀의 장점
1. 사람을 만난다.
2. 늘어가는 인내심
3. 뭐든 할 수 있다는 근거없는 자신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