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트업 환상 깨기3
스타트업에 가고 싶은 가장 중요한 이유가 이번 글의 주제에 관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바로 '자기 성장과 열려있는 기회'.
"모든 방면의 리소스가 부족한 상황에서 얼마만큼의 효율을 이끌어낼 수 있느냐"
그 원동력에는 구성원 개인의 케파, 그리고 팀워크가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이전에는 끊임없이 성장하고자 하는 구성원의 의지가 뒷받침이 되어야 한다.
퇴사한 곳에서, '이 회사가 정말 나의 성장을 바라는 게 맞나?' 싶었던 요소들에 대해 써내려 가보고자 한다.
그 일을 왜 네가 해
마케팅 업무를 하며 대행사와 협업할 일이 많았다. 그런데 대행사도 한 회사의 일만 진행하고 있는 것이 아니니 요청하는 사항이 바로 반영되기보다 어느 정도 텀이 생기는 경우가 많았다. (물론 해당 대행사는 우리와 몸집이 맞지 않게 큰 회사여서 우리 업무가 우선순위에서 밀리는 경향도 있었다.)
업무 해결이 우선순위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딜레이 되는 부분에 대해서 시스템을 살펴보고 구글링을 해가며 업무 해결을 위해 애쓰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사업총괄기획자분이 화를 내더라.
"그 일을 왜 OO가 하고 있어?"
"?????"
"이런 건 대행사 시켜야지. 그럴 거면 왜 대행사를 써."
"네 알겠습니다."
조금만 더 알아보면 해결될 수 있는 부분이었음에도 대행사가 해결해 주기까지 기다려야 했다.
그리고 Duedate이 지나면
"왜 일을 이렇게 해. 너무 느려. 우린 하루하루가 중요한 스타트업이야."
"?????"
대체 어느 장단에 맞추라는 건지. 이런 피드백은 내 업무가 아닌 다른 업무영역에서도 동일했다. 직장 상사의 마음은 일기 예보보다 맞추기 어렵다지만 이건 단순히 그런 문제만은 아니다.
자기 성장을 통한 구성원 개개인의 케파가 커진다는 것, 그것은 내부적으로 문제해결능력을 갖추게 된다는 것과 동일하다. 물론 대행사와 유용하게 협업하는 것도 좋지만 실질적인 실무 논리를 알려고 하지 않은 채 요청만 하게 되면, 1년, 2년 뒤 내부 문제해결능력은 1~2년 전과 다를게 없어진다.
스타트업에서 성장하는 구성원이 필요한 이유다.
설사 커뮤니케이션 스킬 능력으로 협업하여 회사가 단기간에 성장했다 치자. 하지만 문제는 항상 생기게 마련인데, 그때도 문제해결은 외부의 손을 타는 것이 빠르게 된다. 장기적으로 낭비다.
정말 하루하루가 중요하다면 구성원 모두가 하루하루 성장할 수 있도록 격려해주어야 한다.
3개월, 6명에서 11명으로
항상 각자가 맡은 업무(하나)에 집중해달라는 그분의 요구가 진심이었는지(그런데 왜 회사일에 관심이 없냐며 책임감을 운운했는지는 아직도 의문이다.) 3개월 사이에 회사 구성원이 6명에서 11명으로 훌쩍 늘어있었다.
물론 같이 일했던 분들 모두 정말 좋은 분들이었고 실무를 하며 서로에게 많은 도움이 되었다.
그런데 회사 운영 측면에서 이렇게 하는 것이 맞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
이는 내가 1.5~2인분의 일을 하지 못해서였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전에 모두가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주지 않았던 건 아닐까.
마케팅 데이터를 다루면서 가장 크게 느꼈던 점은 데이터도 객관적이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어떤 의도로 가공되느냐에 따라 달리 전달될 위험성이 매우 크다. 의도와 결론이 먼저 정해진 후에 접하는 데이터는 그에 맞게 가공되기 쉽다.
무언가를 해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떠한 가설을 갖고 일을 시작했을 때에는 최대한 빨리 실행에 옮기며 결과를 볼 수 있어야 하고, 실패했더라도 다음 정답을 찾아가기 위한 빠른 실행이 반복되어야 한다. 무조건 성공해야 한다는 압박감은 말 그대로 퍼포먼스, 보여주기 위한 일밖에 되지 않는다.
또한 지나치게 디테일에 집착하기보다 어느 때 데이터를 봐야 하는지, 어느 때 데이터를 후순위로 두어도 되는지 구분하여 적용할 수 있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 예로 브랜드 마케팅이나 PR은 브랜드 인지도 측면의 마케팅 활동이기 때문에 인지도가 얼마만큼 올라갔는지 숫자로 측정하기가 매우 어렵다. 퍼포먼스 마케팅과 같이 CPA의 기준을 매출로 잡고 볼 수 없는 것이다. 브랜드 마케팅은 그 영역에서의 전환 액션 값을 내부적으로 따로 설정하고 그에 대한 효율로 보아야 한다. 전사 KPI가 매출건수라고 하여 브랜드 마케팅이 매출에 얼마만큼 도움이 되냐고 물으면 어느 회사도 브랜딩 활동을 할 수 없다. 시기적으로 강약 조절이 필요할 순 있겠지만 브랜딩이 필요 없는 회사는 없다.
목적 없는 걸음은 이탈 가능성이 높고 표류하기 쉽다. 이는 회사의 비전이 될 수도 있고, 원하는 조직문화가 될 수도 있고, 개인의 성장 목표가 될 수도 있다. 목표가 뚜렷하다면 지름길을 찾든, 우회해서 가든 목적지에 다다르게 될 것이다. 시시때때로 바뀔 수 있는 것은 목적지에 가기 위한 방법뿐이다. 목적지가 시시때때로 바뀐다면, 그것은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단지 표류하고 있는 것뿐이다.
"출항과 동시에 사나운 폭풍에 밀려다니다가 사방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같은 자리를 빙빙 표류했다고 해서, 그 선원을 긴 항해를 마친 사람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는 긴 항해를 한 것이 아니라 그저 오랜 시간을 수면 위에 떠 있었을 뿐이다."
기원전 1세기, 로마 철학자 세네카가 남긴 말이다. 그는 잔인하게 덧붙인다.
"그렇기에 노년의 무성한 백발과 깊은 주름을 보고 그가 오랜 인생을 살았다고 단정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 백발의 노인은 오랜 인생을 산 것이 아니라 다만 오래 생존한 것일지 모른다."
-채사장 저, 「열한 계단」 중
출렁이는 파도를 즐기는 것도 이 파도를 타고 어느 곳으로 가는지가 확실할 때이다.
한 번은 '서로가 부족하지만 피드백을 주고받으며 성장할 수 있는 관계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피드백을 받은 적이 있다. 앞서 말했듯, 퇴사를 한 이유도 이와 같은 커뮤니케이션이 이루어질 수 없겠다는 강한 절망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리고 퇴사 이유 중에 하나로 위 이야기를 했다. 하지만 그건 '너무 이상적이지 않냐'라는 피드백을 받았다.
그러면 당시 그 피드백은 무엇이었을까?
이루고자 하는 비전, 조직문화는 그것이 이상적일지라도 방향을 잃지 않기 위해 꼭 필요하다. 그래야 원하는 바에 가까워질 수 있다. (누군가는 분명한 비전을 갖고 실행력을 가질 수 있길 바란다.)
나는 살아가고 싶지, 생존하고 싶지 않다.
마지막으로 4번째, 나와 같은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의 모임이 스타트업일 거라는 기대는 앞서 쓴 모든 부분에서 '다름'을 느꼈다. 이렇게 정성스레 퇴사기를 쓰는 것은 다음으로 나아가기 위해, 나도 같은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 반드시 정리가 필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로써 짧았지만 강렬했던 스타트업 퇴사기를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