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셩 Jun 01. 2021

태어남, 이유, 인연

고양이 백호가 태어난 이유, 나를 만난 이유


엉겹결에 사무실로 들어와버려 놀란가슴 달래고 있는 길고양이 시절 백호



하루를 정리하고 잠자리에 들어갈 즈음

막내 고양이 백호는 이른 잠을 청하다 갑자기 깨고는

이상한 울음을 하며 작은 털공을 물어온다.


집사가 해야 할 일은 단순하다.

거실 바닥에 엎드려 눈높이를 맞춘 뒤

엄지와 검지, 두 손가락으로 가능한 공을 멀리 힘껏 튕겨주는 것.


그냥 던져주면 재미없으니

몇 번 공을 튕기는 척 한다.

요녀석도 쫄깃한지 스릴을 즐긴다. 감질맛나는 예고편 없이 바로 튕겨주면

오히려 시시해한다.


알맞게 튕겨진 공을 전속력으로 쫓아가

야무지게 한 쪽 송곳니에 앙 물고 저 멀리서 토박 토박 걸어오는 백호를 보고 있노라니

너의 삶의 큰 즐거움을 내가 함께 하고 있다는 게 신비롭다.


공 앙


백호의 일상은 단순하다.

지금은 겨울이니 가능한 따뜻한 곳에서 푹 자고 (글을 쓰다 저장한 시점이 2월이었다)

자다가 기싱꿍꾸었을 땐 이상한 소리를 내며 울면 집사가 걱정하며 찾으러 온다.

가끔 집사의 얼굴이 궁금하면 직접 보러 행차하시고,

같이 사는 형제자매들에게 하루에 한 번씩은 꼭 결투를 신청하고.

배고프면 밥 까시락 거리며 먹으며 간식은 언제 주나 눈치보고,

그러다 못 참겠으면 쨍한 목소리로 끈질긴 요구를 하여 기어이 맛난 간식을 얻어낸다.

그리고 심심하면 털공을 가지고 와 앵 울면 집사가 달려나와 공을 던져준다.


지금은 이렇게 온 식구에게 사랑받는 백호지만

한때 앞날을 점치지 못할 만큼 불안정한 시기가 있었다.

길고양이 시절,

셔터가 내려져 사람은 들어갈 수 없는 공사장 짐더미 안에 숨어 추위를 피하고

배고프면 높은  위로 올라가 울며 사람들에게 밥과 간식을 얻어내던

길냥생활 몇회차인지 모를정도로 능숙(?)했던 어린 길고양이.


어쩌다 새벽에 출근한 직원 따라 자기가 쏙 들어와놓고

놀란 마음에 이리 숨었다 저리 숨었다 결국엔 강의실 책상 아래 쌓인 짐 위에 앉아

잠시 숨 고르던 소심쟁이.


사람을 싫어하는 줄 알았더니 왠걸

어찌어찌 이동장에 넣으면서 쓰다듬었더니

순식간에 골골송을 부르는 속 모르는 아이.


운 좋게 스스로 잡히는 바람에

이렇게 함께 살게 되었지만

여전히 사람 좋아하고 호기심 많으면서도 겁도 많은 모습에

계속 길에서 지냈더라면 어쩔 뻔했나. 아찔하다.

나름 길고양이 시절엔 패기 넘치는(!) 눈빛을 하고 있었으나

집고양이가 된 지금은 순하디 순하다 못해 바보같은 눈망울을 자주 보여준다.


가끔, 여전히 그때 공사장 구석에서 지내던 너의 마음이 궁금하다.

지금은 언니오빠들과 함께 살아서 행복한지, 묻고싶다.



냥태공~



내가 보지 못한 백호의 일상

빛나는 눈망울로 바깥을 바라보는 백호의 생각

잠시의 길생활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마음을    하면서도 툭하면 도망다니며 마음을 서운하게 만드는 백호


모든 집사가 그렇겠지만

대화를   해볼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내가 너에게 좋은 인연이 되고 있는지

태어나보니 이번 생은 어떠한지

무심코 툭 몸에 붙여오는 너의 꼬리와 엉덩이가

많은 것을 얘기해주고 있기는 하지만

아직 나는 많이 부족하고

계속 부족할 수밖에 없겠지

너라는 존재를 담아내기에는


인연이란 게 그런 거겠지







작가의 이전글 8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