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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군 Apr 11. 2016

영남 알프스 억새바람길을 걸으며...


꼭 거창한 이유나 의미가 있어야 좋은 여행이 된다는 법은 없다.

우리 나라에도 알프스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사실 여부를 확인하러 떠났다. 짐은 가볍게, 기대와 부푼 마음은 무겁게 채우고 울산 터미널에 도착했는데.... 울산 시내에서  등산로 입구까지가 너무 멀다.ㅜㅜ 시내버스를 두번 타고 1시간 반정도 가야 산의 입구에 도착할 수 있는 거리였다. 간월산으로 바로 갈 계획이라면 '언양터미널'로 가는게 가깝고, 영축산쪽으로 내려온다면 '통도사신평버스터미널'까지 걸어서 내려 올 수 있다. 나는 여기서 버스를 타고 부산으로 향했다.  


영남 알프스는 총 4코스로 이루어진 일주 트래킹 코스인데 그 중에서도 가장 아름답다는 1코스 억새바람길(하늘억새길)을 목표로 삼았다. 이 길은 간월재에서 신불산을 지나 영축산까지 이어지는 능선길인데, 그 길이 어렵지 않고 나무 데크로 잘 정리 되어 있다고 하여 편안한 마음으로 출발했다. 하지만 미처 예상하지 못한 큰 난관에 부딪치게 되는데, 1,000미터가 넘는 산을 오르고 내려오는 일이었다.(난 바보인가? 어떻게 이걸 예상못할 수가 있지?) 간월산장에서 간월재로 오르는 길도 힘들었지만, 영축산에서 통도환타지아 쪽으로 내려오는 길은 몇배는 더 힘들었다. 이정표도 불분명하고, 땅이 많이 젖어 있고 미끄러운 진흙길이라 느릿느릿 내려오다보니 이내 무릎에서까지 통증이 오기 시작했다. 꽤나 많이 무리를 했나 보다. 그렇게 통증을 안은채 두시간정도를 더 서다가다를 반복하며 하산해야 했다. 출발할 때 버스를 잘못타서 길을 헤매다 11시쯤 입산했는데 하산했을때는 저녁 6시가 넘어 있었다.



억새바람길은 가을에 와야 절정의 풍경을 볼 수 있다. 청개구리마냥 정 반대되는 계절에 찾아 왔으니 당연히 반겨줄 억새는 없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보면 사람으로 빼곡할 곳을 내 눈으로, 내 몸으로, 내 사진으로 독차지 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영광인가!  고요한 능선을 따라 걸으며 영남의 알프스를 마음껏 느끼고 누비는 호사를 누렸다.

억새가 아니어도 하늘억새길은 이미 너무나 아름다웠다. 어쩌면 가을에는 사람에 치이고 억새에 집중하느라 진짜 이 길의 청정한 아름다움을 구석구석 못 보게 될 가능성이 높다. 사람을 볼 때에도 마찬가지일 것 같다. 무언가 특별한 재능을 가진 사람이 빛을 발할 때, 그 빛나는 한 가지로 인해 그 외의 다른 모습들은 못보고 판단할 수도 있을테니 말이다. 그러니 산도 사람도 가장 아름다울 때 빛나는 것을 볼 수 있고, 가장 추울 때 빛나는 것을 볼 수 있도록 여러 계절을 함께 해 보아야 하는 것 같다. 억새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나니 길 위에서 만나는 모든 하늘과, 바람과, 돌과, 나무와, 사람들의 모습 속 아름다움이 더욱 빛을 발하는 것 같았다.



간월재에 있는 휴게소는 그 위치나 모습이 산과 잘 어우러져 한폭의 그림같다. 테이블과 휴게시설이 잘 구비되어 있어 대부분 이곳에서 점심을 먹게 된다. 나도 출발할 때 사온 김밥 한 줄과 이곳에서 구입한 컵라면을 함께 먹었다. 옆 테이블의 한 무리의 아저씨 아주머니들은 회를 사와서 드실정도로 푸짐한 만찬을 즐기고 계셨다. (산의 정상에서 바다의 날것을 먹는 기분은 어떨까? 군침이 줄줄...)


산에서 먹는 컵라면에는 특별한 감동이 있다. 왜 그럴까?

일단 가격이 두배가 넘는다.ㅜㅜ 그만큼 국물 한 모금도 허투루 먹을 수 없다. 같은 컵라면이라도 장소와 가격에 따라 라면을 대하는 나의 태도가 변한다는게 슬픈일이지만, 돈과 시간과 에너지의 소비를 뛰어넘는 감동을 얻을 수 있다면 밑지는 일은 아닐 것이다.

보편적이고 저렴하고 흔하다는 것은 그만큼 가치를 인정받기 힘들다. 세상은 희소한 것에 더 높은 가치를 부여하고 특별하게 대우한다. 그래서 특별한 감동을 주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이 비싼 컵라면처럼 희소한 곳에 올라가야만 한다. 보편적이고 흔하지 않은 곳까지 올라가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세상의 논리가 과도한 경쟁으로 이어지고 가진자들의 '사다리 걷어차기'식의 입산통제로 이어지는 부작용들이 가득하지만, 부지런히 노력하고 갈고 닦아 자신만의 꿈의 산에 오르는 이들에게 감동하는 세상이 더 편만해지기를 바래본다. 하지만 늘 역설적이게도 가장 소중하고 가치 있는 것들은 보편적이고, 흔하다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겠다.


산에서 먹는 컵라면에게 특별한 감동을 받는 또다른 이유는 라면을 받아들이는 나의 몸 상태가 다르기 때문이다. 가빠오르는 숨과 허기가 뒤엉켜 온 몸에서는 허기와 관련된 각종 호르몬들이 분비되는 것 같다.(과학적, 의학적 근거 전혀 없음..^^;) 거기다 옆테이블에서 '회'와 같은 걸 먹는 모습을 흘깃 보게 된다면, 그 강도는 더욱 쎄진다. 그렇기에 각종 'MSG'로 무장된 지상 최고의 요리인 컵라면이 몸 속으로 들어 올 때, 초자연적인 현상의 감동이 찾아오게 되는 것이다. 따뜻함과 든든함으로 온 몸과 마음을 '맛사지'해주는 것과 같은 효과를 느끼게 된다.

만약 삶 속에서 진한 감동을 잊고 산지 오래 되었다면 지금 당장 간월재로 떠나 컵라면에 자신이 오장육부를 맡겨 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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