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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군 May 14. 2019

김상욱의 양자공부

아무도 시키지 않는 양자공부

 이런 책을 읽는다고 하면 다들 이상하게 쳐다본다. 내가 정말 이상한 걸까? 난 왜 이런 책에 관심과 흥미가 생긴 걸까? 공대를 나왔으니 보통 사람들보다 과학에 대한 관심과 이해의 폭이 넓기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세상 만물의 섭리를 탐구하고 깨달았을 때 오는 경이로움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이 더 이상한 건 아닐까? (이런 말 하면 날 더 이상하다고 생각하려나? >.<)

양자역학은 공부하면 할수록 이해할 수 없는 학문이다. 저자도 이 책을 읽으며 양자역학이 잘 이해가 된다면 물리학 천재 이거나 정신병원에 가봐야 한다고 말할 정도다. 그러니 나도 당연히 잘 이해를 하지 못했다. (난 지극히 정상인이다.^^)

 1부는 양자역학의 기본적인 개념과 발전과정에 대한 기술이라 그런대로 잘 이해하며 쫓아가는 듯했다. 하지만 2부로 넘어가면서 카오스니 프랙털이니 다중우주, 엔트로피, 정보엔진등등 심화과정에 들어가니 바로 내 머리가 카오스 상태가 되어 버렸다. 우리 눈으로는 절대 볼 수 없는 미시세계이면서 우리가 당연하게 알고 있는 거시세계의 물리학 법칙이 적용되지 않는 양자의 세계를 단순히 머릿속으로만 그려낸다는 건 불가능한 일인 것만 같다.

“과학의 역사는 인간의 상식이나 경험이 얼마나 근거 없는가를 보여 준다. 과학을 제대로 하려면 우선 철석같이 믿고 있는 상식조차 의심해야 한다. 따라서 과학의 핵심은 합리적 의심이다.”

양자역학이야말로 직관의 덫을 버려야 하는 최고 단계일 것이다. 그렇다면 난 그나마 버릴 직관이 과학자들만큼 많지 않기에 그들보다 양자역학을 이해하기 더 좋은 상태인 것은 아닐까? 라는 합리적 의심을.....

자 그럼 나같은 일반인이 배운 양자역학에 대한 기본적이고 중요한 개념들만 정리해보자. (당연히 오해의 소지나 부정확한 정보가 될 수 있음에 주의해야 함!)

 양자역학이라는 것은 원자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설명하는 과학이다. (이 정도만 알아도 양자역학에 대해 아는 상위 10%는 되지 않을까?)
인간의 몸도 그렇고 세상의 모든 물질도 원자로 이루어져 있으니 양자역학을 공부한다는 것은 모든 만물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상을 탐구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원자는 원자핵과 전자로 이루어져 있는데 우리의 상식을 넘어서는(전자의 입장에서는 상식이겠지만) 전자의 움직임을 파악하는 게 양자역학의 핵심이다. 기술이 발전하며 이 전자의 움직임을 제어할 수 있게 되면서 반도체도 만들고 스마트폰도 만들 수 있게 된 것이라고 하니 현대인들의 삶에 이렇게 중요한 학문이 또 있을까. (제발 연구를 멈추지 말아 주세요~~)

“전자는 입자다. 하지만 파동처럼 행동한다.
이때의 파동은 확률파동이다.”

전자도 빛처럼 이중성을 지닌다. 하지만 측정의 어려움으로 정확한 위치와 운동량을 알 수 없기 때문에 확률로 접근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뭔가 부정확하다는 것은 아닌 것 같다. 계산으로 정확한 에너지양을 계산할 수 있다고 하니 말이다.

“파동은 공간에 갇혀 있을 때, 정상파라고 하는 특별한 상태를 이룬다. 정상파는 특별한 길이의 파장만을 가질 수 있다. 전자의 파동성이 원자의 안정성을 보장한다.”

“전자는 오직 정상 상태의 궤도에만 존재할 수 있다. 이웃한 두 궤도를 넘나들 때, 그 사이 공간에 존재하지 않으면서 지나가는 것을 ‘양자 도약’이라 한다.”

원자의 세계에서는 종종 우리의 언어로 표현된 적이 없는 상황에 맞닥뜨리게 되는데 ‘양자도약’도 그중 하나다. 존재하지 않으면서 지나간다니 무슨 순간이동이라도 한다는 말인가. 전자를 쫓아다니며 그 비법을 배우고 싶어 진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나 만화의 소재로도 아주 매력적일 것 같다. 이미 앤트맨 같은 영화에서 양자의 세계가 등장하기는 하지만 무궁무진한 더 많은 소재들을 생각해 낼 수도 있을 것 같다. 물론 양자역학을 더 많이 이해해야 더 많이 생각해 낼 수 있겠지만 말이다.

“결국 전자의 위치와 운동량을 동시에 정확히 알기는 불가능하다. 위치가 정확해지면 운동량이 불확실해지고 운동량이 정확하려면 위치가 부정확해지기 때문이다.”

“측정은 반드시 교란을 수반할 뿐 아니라, 위치나 운동량의 오차 중 한쪽을 줄이는 것이 다른 쪽을 늘이게 된다. 이것을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라 부른다.”

측정을 하고 싶은데 측정을 하는 행위 자체가 측정을 방해하는 요소가 된다니 이 무슨 운명의 장난 같은 상황인가? 불확실한 것에 ‘사물의 근본이 되는 이치’라는 확실한에 것을 말할 때 쓰는 ‘원리’라는 단어를 붙였다는 것만 봐도 이 상황의 어려움과 심각성을 엿볼 수 있다. 모르는 내가 봐도 황당한데 연구하던 이들은 얼마나 속이 터지고 답답했을까?

“측정(관측)의 주체는 우주 전체다. 양자역학에서 측정의 주체는 환경이다. 환경이 주체가 되는 관측을 ‘결어긋남’이라 부른다.”

이건 또 무슨 소릴까? 양자역학에서 ‘결어긋남’, ‘양자얽힘’은 중요한 용어 같은데 뭔가 철학적인 사유까지 동원해야 하는 기분이 든다. 환경이 주체가 되는 관측이라니 환경을 의인화해야 하나? 이 부분은 아무래도 나랑 결이 안 맞는 듯... 적당히 넘어가자~

양자역학의 세계는 우리가 그 원리와 의미를 몰라도 문제없이 잘 돌아가고 있다. 양자역학이 없던 시대에도 우리는 잘 살았으니 말이다. 문제가 되는 것은 단지 우리가 이해하고 싶은데 이해할 수 없다는 것뿐이다.

우리가 경험이나 직관을 통해 옳다고 생각해 왔던 것들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해주는 양자역학의 세계를 보며, 당연하다고 생각해왔던 상식이 파괴되고, 알 수 없고 불확실한 미래를 향해 삶을 던져 도약하는 우리의 모습도 어쩌면 양자의 세계와 닮아 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더 큰 우주의 세계를 알고자 하는 인간의 탐구심과 더불어 더 작은 세계를 알고자 하는 인간의 노력의 역사에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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