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는 아빠를 닮았다.
태어났을 땐 어딘가 나를 닮은 부분이 있을까 내 딸이 맞나 싶을 정도로 말이다. 그런데 만 8년 정도 같이 살다 보니 그 녀석이 날 닮은 부분이 생긴 것이다. 이제 누가 봐도 나의 딸인 줄 알만한 지점이 생긴 것이다.
바로 책이다.
이 녀석이 아빠, 엄마 다음에 한 말은 책이었다. 원래 치읓은 발음이 어렵기 때문에 늦게 배우는 단어일 텐데 그 녀석의 선택은 책이었다. 그다음 단어는 차였다는 사실에는 놀랍지도 않았다. 녀석이 돌이 되기 전에 파트타임일을 하던 나는 친정에 아이를 맡겨야 했는데 우리 엄마는 항상 차를 마시면서 책을 보시고는 했기 때문이었다.
나도 그런 엄마를 닮았고 이제 내 딸도 그러하다. 나도 엄마를 닮아 책을 와구와구 먹는다. 지난해 예스 24에서
내 나이 때 대비 상위 5% 구매금액자라는 사실을 알려주더라. 빨리보고 싶어서 쿠팡에서 산 책, 서점에서 집어 든 책 까지 합하면 랭킹은 좀 더 올라갈 것 같다.
코로나로 도서관이 문을 닫은 후 딸은 집에 있는 책을 다 읽었다며 슬퍼했다. 나도 코로나로 휴원 한 상황에서 월급이 확실치 않아서 책을 사주는 것에 주저하게 되었었다. 낱권 주문으로 버티다 버티다 결국 얼마 전 전집을 하나 질렀고 딸은 세상 가장 행복한 표정을 선사했다.
딸은 전집이 배달 오는 날을 가장 좋아했다. 어릴 때 전집 박스를 열며 보여준 함박웃음을 찍어 놓은 사진도 있다. 딸이 태어나서부터 사 준 책을 누적해서 계산한다면 마음이 아플지도 모른다. 그 돈으로 빚을 갚거나 저축했었으면 자산이 늘어있었을 지도.
책을 돈이 있어서 여유 있게 사준 것은 아니었다. 나는 아직도 전집을 살 때는 예전 동네 책방에 가서 사는데 아동 전문 서점이라 웬만한 세트는 다 샘플이 있기 때문이다. 한 6년 정도 다니다 보니 얼마 전에는 사장님께서
" 그런데 여쭤봐도 되나요? 어떤 일 하세요?" 하시더라.
행색은 남루하게 다니는데 책에는 돈을 쓰는 이상한 부부이기도 해 보이지만, 그분은 우리가 책 받는 주소지를 적어 온 탓에 우리 이사 경로를 천왕, 마곡, 반포를 다 아는 외부인이기도 했다. 그래서 우리가 사업을 해서 성공했거나 그렇게 오해하신 듯했다.
"회사 다니는 데요."
라고 대답은 하고 의심의 눈초리를 받긴 했는데 사실 책을 좋아하는 딸은 둔 죄 밖에는 없지 않은가? 아직도 기억난다. 우리 가정의 수입이 지금의 몇 분의 일 밖에 되지 않을 때도 카드로 10개월씩 할부해가며 책을 사던 순간들. 얼마 전 이제 쉬워져 버린 책들을 몇 백권 친구 자녀에게 다 선물했는데, 부디 우리가 애착을 가지고 산 책들을 잘 읽어주길 간절히 바랬다.
도서관 옆으로 이사 왔으니 이제 책을 덜 사줘도 되겠지 하는 것은 큰 오해였다. 딸은 책을 읽고 또 읽어서 결국 낱장이
떨어질 때까지 너덜너덜하게 만들었다. 결국 도서관은 플러스 알파로 남게 되었다. 중고책들을 사지 않았던 이유는 아주 정직했다. 중고거래는 현금으로 해야 되는데, 우리는 처음에 현금이 없었고 할부로만 살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덕분에 우리는 비싸게 새책을 사지만 책을 험하게 보는 딸 덕에 중고로 팔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 딸의 9번째 생일이 며칠 앞으로 다가왔다.
그래서 어제 강남 교보문고에 데려가면서 고민을 했다.
선물 받은 5만 원 상품권이 있어서 5만 원어치를 사줄까 하다가 5만 원 안에서 내 것도 한 권 사고 싶은데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름 꼼수를 쓴다고 3권을 고르라고 했다.
왠 걸 같이 고르다 보니 오 이것도 재미있겠다. 오 저것도 재미있겠다. 그렇게 우리는 훨씬 초과된 예산을 집행하고야 말았다. 이틀 뒤에 어제 예스 24에서 산 애들도 올 텐데. 문제는 그 책들이 오기 전에 산 책을 다 읽을 딸이 아니라 내 잔고 일 뿐이다. 그래도 책에 쓴 돈은 죄책감이 조금 희석되는 건 사실이다.
그 책을 안고 생일파티를 할 장소, 할머니 집으로 이동을 했는데 내리자 비가 오고 있었다. 우산은 막내아들 것 하나만 있었는데 아들이 우산을 피자 딸내미가 하는 말.
"같이 쓰자."
장난꾸러기 동생은 이미 저만큼 뛰어가고 있었다. 그러자 딸내미가 따라 뛰며 소리치고 있었다.
"야 내 책 좀 씌워줘~~."
뒤에서 보는데 그 모습이 어찌나 웃기던지. 어차피 험하게 볼 책이면서 새로 산 책이니 뭔가 소중하게 느껴졌나 보다. 나 좀 씌워줘도 아닌 내 책 좀 씌워줘 라니, 하하하. 동화작가가 꿈이라니 이 녀석 언젠가 이룰 수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