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부터 나는 명백하게 이기적으로 살고 있는 사람들을 부러워하기 시작했다.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뜻의 이름을 가지고 있던 나는 그 이름 때문인지 늘 누군가를 배려하고 양보하는 것이 내 운명인 것처럼 살아왔었다. 요즘은 이기적이라는 단어가 현명함으로 분류하기도 하지만 내가 어릴 때에는 이타적인 것이 절대 선이고 그 반대가 절대 악인 것처럼 고려되기도 했었다. 지금 돌아보면 착한 척하느라 답답하게 산 것이지 착하게 산 것은 아니었다는 생각도 많이 든다. 내가 정말 착한 것이었다면 내 마음속에 양보하고 이해했던 것들에 대한 응어리가 남지 않았을 것이다.
착할 선(善)이라는 한자를 보유한 내 이름은 내가 감당하기에 너무 무거운 굴레였다. 그 인생을 이름과 함께 내려놓고자 영어 이름을 쓰며 살아가고 있지만 이름을 바꾼다고 20년 넘게 지녀온 습관이 쉽게 바뀌지는 않는지라 나는 여전히 고생하고 있는 면이 없지 않아 있다. 누군가 자녀의 이름에 착할 선(善)을 넣는다고 하면 뜯어말리고 싶을 정도이다.
이런 백그라운드 때문인지 나는 한 번 친구가 되면 모든 것을 내어 줄 것처럼 관계를 지키려 애쓰고는 했던 것 같다. 갈등 상황을 만들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여겼던 나는 누군가에게 No라고 대답한 적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 그래서 지금도 내가 유일하게 부러워하는 부류의 사람이 있다면 No라고 잘 말하는 사람들이다.
초등학교 때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내 주위에 앉아 있던 그 친구는 가방에서 칸쵸를 꺼냈다.
"먹을래?"
"아, 응 고마워."
"근데 나 네가 가지고 있는 그 손지갑 갖고 싶어."
"이거?"
당황했지만 이미 친구가 건넨 칸쵸 하나를 먹었던 나는 안 돼 라고 말하지 못했다. 참 슬픈 날이었다. 그 친구가 설마 작정하고 그 칸초를 나한테 먹인 것은 아녔을까 라는 생각까지 하면 너무 음모론인가?
이렇게 나에게 무언가를 요구하는 사람들에게 시달렸던 사례는 흔하고 흔했다. 중학교 때까지 반장은 약간 절대 권력자 같은 것이지 않은가? 그런 반장이 자신의 숙제를 나에게 해달라고 했고 그때도 거절하지 못했다. 진짜 지금의 내가 가서 '이 바보야'라고 어린 나를 다그쳐 주고 싶다.
이 외에도 학생 때 너무 급하게 돈이 필요하다고 해서 5만 원을 빌려주었는데, 그 뒤로 그 친구가 여기저기서 무엇을 사 먹는 것은 보았지만 결국 나에게 돈은 돌아오지 않았다. 큰돈도 아닌데 말하는 게 너무 쫌스러운가 고민하던 나는 친구가 그 사실을 잃어버렸나 보다 라며 혼자 합리화하고 말았다.
이렇게 나의 단호하지 못함을 이용하는 사례들도 많은 한 편, 나는 내가 자발적으로 친구를 위해 무언가 해주기를 자청할 때도 많았다. 지금도 그렇지만 누군가 언제 어떤 도움이 필요하겠다 싶으면 나는 기꺼이 그 자리에 달려가고는 했다. 운전을 할 수 있게 된 때부터는 친구들을 집에 데려다주는 것도 기꺼이 정말 기쁨으로 했다. 어디를 같이 가달라고 하면 같이 가주고, 특히 정성이 담긴 서프라이즈 선물하는 것을 즐겨했다. 그러나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가 된다고 이내 사람들은 내가 그들에게 해주는 진심에 크게 고마워하지 않았던 것 같다. 보람이 사라지고, 뒤통수 맞는 것 같은 느낌의 관계들은 어른이 될수록 더 많이 출몰했다. 인생이 원래 갈수록 친구 찾기가 이렇게 고난도로 설계되어 있는 것이었을까?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대하느냐도 중요한 것이지만 내가 점점 누군가를 위해 무언가 해주고픈 마음을 잃어가고 있다는 것이 때로는 더 슬프기도 하다. 이렇게 나는 현명해져 가고 있는 걸까?
간담상조, 관포지교, 막역지우처럼 친구에 대한 사자성어를 창조해 낸 그분들은 서로를 어떻게 대했길래 이렇게 역사에 길이 남을 만한 친구의 예시가 된 걸까? 아무리 생각해도 나처럼 호구는 아녔을 것 같다. 사실 No라고 말하지 못해서 겪은 슬픈 사례는 책 한 권으로 만들어도 부족하겠지만, 더 이상 열거하지는 않으려 한다. 자꾸 복기하면 친구가 하나도 없는 것이 낫겠다거나, 내가 일 평생 좋은 친구를 거의 만나지 못한 것 같은 회의감으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나는 여전히 누군가에게 거절을 해야 될 때 여러 차례 돌려서 말하는 성격이다. 그렇게 당하고도 누군가에게 나쁜 말 한마디 못하는 내가 나도 싫다. 피해자는 있지만 가해자는 없다 라는 말을 요즘 들어 여러 번 듣게 되었던 것 같다. 그러다 보니 피해자의 치료도 셀프가 돼야 한다. 그게 나의 아픔을 누군가에게 말로 털어놓으면 자꾸 그 기분을 다시 느끼게 되고 잘못하면 험담 정도로 전락하고 말기 때문에 나는 이 모든 것을 글에 묶어 둘 수 있는지 지금 실험해 보고 있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