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라는 단어를 해체해 보려고 하니 친구라는 단어가 꼭 긍정적인 의미로만 쓰이고 있지 않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왠지 길가다 누가 “거기, 친구”라고 부르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앞으로 달릴 것 같다는 생각도 해본다. 그렇게 친구는 아주 절친한 사이를 뜻 하기도 하지만, 이름 조차 모르는 사람을 지칭할 때 쓰이기도 한다. 또 다른 관점에서 보면 나보다 나이가 명백히 어린 사람을 만나게 되는 상황이 오면 “친구는 이름이 뭐예요?”라고 말하게 되기도 한다. 그러고 보니 애초부터 간단한 단어가 아니었던 걸 수도 있고, 대한민국에서 너무 사랑받는 단어이다 보니 여기저기 불려 다니면서 쓰이게 된 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어찌 되었든 간에, 그 친구라는 단어는 너와 나의 관계가 성립됨에서 출발한다. 너와 내가 대체로 가까운 사이라는 것 까지는 공감하는 바이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여러분에게 가까운 사이라고 정의되는 사람이 꼭 좋은 영향을 주고 있는 것은 아닐 수도 있지 않은가? 그래서 친구라는 단어도 형용사의 도움을 받아야 했던 것 같다.
나쁜 친구, 좋은 친구.
나쁜 친구라는 단어는 아이들끼리 싸우는 현장을 중재할 때나 쓰는 단어 같긴 한데, 예를 들어 “친구를 때리면 나쁜 친구예요.”라는 식으로 말이다. 여기서는 때린 그 아이 자체가 나쁜 아이라는 표현으로 단순한 뜻일 수 있지만, 성경책을 보니 나쁜 친구는 어떠하다 라는 표현이 매우 정확하게 쓰여 있었다.
“나쁜 친구를 사귀면 품행이 나빠집니다.” (고린도 전서 15:33)
그렇다. 사실 이 문장은 기독교 신앙과 상관없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두에게 인정받는 내용이라 믿는다. 나쁜 친구는 우리를 나쁜 길로 이끈다. 품행이 나빠진다는 표현은 성경 저자가 젠틀함으로 유하게 표현한 것 같고 사실 한 사람의 인생이 완전히 바뀔 수도 있을 정도의 영향을 받는다는 뜻을 표현하고 있지 않겠는가? 굳이 멀리 나가서 찾지 않아도 우리는 이런 사례들을 목격하고, 사실 우리도 그 상황들 가운데 놓여있을 수 있다.
솔직히 내가 누군가에게 좋은 친구였는지는 조금 더 시간을 두고 돌아보아야겠지만, 나에게 나쁜 영향을 준 친구들도 있긴 했다. 유치원생 때 우리 동네에는 슈퍼가 단 하나 있었다. 부모님이 거기서 무언가 고르라고 할 때 설레었던 기억이 새록새록하다. 그 슈퍼에 대해서는 다른 기억도 아직까지 존재하는데, 바로 돈을 지불하지 않고 무언가를 먹은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느 날, 동네 대장격이었던 아이는 우리 동네 아이들을 데리고 슈퍼에 갔다. 주인은 계시질 않았고, 그 친구는 친구들에게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꺼내 주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얼떨결에 받아 들은 아이스크림을 먹기 시작했는데, '돈은?'이라고 묻던 내게 그 친구는 '괜찮아. 그냥 먹어.'라고 대답했다. 그 뒤 친구와의 상황은 기억에서 삭제되었는데, 내가 부모님께 가서 이러저래 말해서 나중에 찾아가서 상황을 말씀드리고 돈을 지불했던 걸로 기억한다. 순식간에 나쁜 행동에 참여했 어도 그 불편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갈 자신이 없던 것이다.
또 한 번은 놀이터에서 패싸움 까지는 아니고 여자애들 그룹끼리 싸움이 붙은 적이 있었다. 초등학교 2학년인가 였는데, 놀이터를 지배하던 센 언니들은 그보다 어린애들도 편을 갈라 기어이 싸움을 붙인 것이다. 그 놀이터에서 놀려면 그 이벤트에 껴야만 했던 나도 그 상황을 피할 수 없었다. 그때부터 나는 놀이터가 싫어졌다. 그리고 지금도 놀이터에 가고 싶지 않다. 놀이터는 목소리 크고 덩치가 큰 무법자들이 지배하는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내가 참여하지 않겠다고 뚜렷이 말하지 못한 것에 죄책감이 꽤 오래 지속되었기 때문이다.
당시로는 작고 왜소하며, 누군가에게 No라고 대답 못하는 나 같은 사람들은 나쁜 친구들의 타깃이 되기 쉽다는 것을 이른 나이에 깨달아서 일까, 나는 나쁜 친구인지 좋은 친구인지 분별 못할 바엔 차라리 외롭고 말겠다는 생각도 참 많이 했던 것 같다.
그럼, 반대로, 좋은 친구가 뜻하는 바는 무엇일까? 앞에서 여러분은 몇 명의 친구를 가지고 있는가를 질문받았다.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을 더 해보자면, 그들 중엔 좋은 친구가 있는가? 여러분이 좋아하는 친구와 좋은 친구에 대한 정의가 일치된다면 참 좋겠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내가 좋아하는 친구는 그날 그 시간을 아름답게 하지만, 좋은 친구는 앞으로 시간을 풍요롭게 한다. 좋은 친구도 나쁜 친구처럼 나에게 영향을 미치는데, 좋은 방향으로 갈 수 있도록, 아 이런 말은 너무 어렵고 그래 성경 저자의 말을 좀 빌리자면, 바른 품행을 갖도록 나를 도울 것이다.
친구 따라 강남 간다라는 말도 있듯이, 나도 그런 영향을 준 친구가 있었다. 그중에서 고등학생 때 같은 독서실에 다니자고 했던 친구가 기억이 난다. 그때 친구가 소개해 준 덕에 처음으로 깜깜하고 좁은 공간의 꽉 막힌 책상에 앉아 혼자 공부하는 법을 해보게 되었는데, 그 뒤로 성적이 급 상승할 수 있었다. 친구 덕에 당시 나에게 맞는 공간과 공부법을 찾은 셈이었다. 이와 관련된 또 다른 에피소드는 대학교에서 첫여름방학을 맞이했을 때의 기억이다. 고등학생 때 까지는 없던 난데없이 긴 방학을 맞이한 나와 동기들은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때 한 친구가 학교에 근처에 YBM 영어학원에 가보자고 해서 같이 가보게 되었다. 데스크에서 서서 고민하던 나와 친구는 다짜고짜 제일 긴 수업을 듣자고 해서 그 방학 졸지에 친구와 얼떨결에 토플 수업을 들었고, 이후 그때 딴 점수로 교환학생을 신청할 수 있었다. 돌아보니, 그 친구들에게 고맙다는 말을 못 하고 지나오지 않았을까 싶다. 좋은 친구였다는 것은 함께 있을 때가 아닌 시간이 지나고 나서의 평가일 수 있으니 말이다.
아, 그렇다면 나의 한 가지 오해는 풀린 셈이다.
나는 좋은 친구는 영원해야 된다고 굳게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영원까지는 아니어도 꽤 오래 지속돼야 좋은 친구라고 생각했었기에 그들과 멀어지는 과정 속에서 지금까지 내가 애써온 모든 친구 관계가 부정당한 느낌을 가지고 있었었다. 좋은 친구가 나를 바른 길로 가게 영향을 준 친구라는 관점으로 바라보면, 그 친구는 내가 바른 방향을 선택하게 돕는 것 까지가 우리 만남의 임무였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의 관계에 부여된 과업을 모두 이루었을 때는 헤어짐과 느슨해짐이라는 것은 당연한 수순일 수 있으니 말이다.
우리는 첫사랑을 생각하면서 이런 말을 한다. 그 사람이 그리운 것이 아니고, 그 사람을 순순하게 사랑했던 내 모습이 그리운 것이라고. 어쩌면 친구와의 관계에서도 그런 것 같다. 나와 자주 만나고 소통했던 그 친구가 그립고 그와의 멀어짐이 아쉽기도 하겠지만 그때 그 친구와 함께 할 때 행복해했던 내 모습이 그립다는 것, 그 진실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