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균만큼만 해

by 스테이시

평균화된다는 것은 얼핏 보기에 너무 고귀해 보이고, 저 단어로 말미암아서는 어떤 나쁜 감정도 느낄 수 없을 것 같기도 하다. 그렇지만, 나는 이 단어가 너무 무섭다.


“평균만큼만 해.”


라는 말은 우리 사회에서 무언가 못 하는 사람을 질타하는 말로써의 역할보다 더 잘하고자 하는 사람을 억누르는 역할로 더 많이 쓰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자기보다 부족한 사람에게 더 발전하라는 말은 잘 건네지 않는다. 다른 사람의 성장에 큰 관심을 둘 열정은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런 열정이 생길 때가 있는데 누군가 나보다 잘될 때이다. 특히 그 누군가가 자기와 많은 것이 비슷한 친구 일 때 그 사람이 나보다 더 잘되는 것을 경계하려는 본능이 튀어나온다.


친구가 무언가를 도전하려고 고민하고 있다면, 당신은 현실적인 이야기를 해주는 편인가 밑도 끝도 없이 할 수 있다고 해주는 편인가? 나는 친구의 이야기가 이미 결혼 한 남자와 결혼하고 싶다거나 로또 1등 종이를 위조로 만들고 싶다는 류가 아니라면, ‘한 번 해봐.’라고 할 것 같다. 그 친구가 도전해보고 싶다는 일을 가능케 할 능력이 있는지 없는지 중요하지 않다. 친구의 역할은 전제 없는 응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말은 나도 친구로부터 이 것을 기대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친구가 어떤 일을 해서 좋은 결과를 얻으면, 나와 다른 류의 사람이 되어 멀어질까 두려워하고, 그것보다 더 두려워하는 것은 그 친구가 성공했을 때 자신이 느낄 질투심이라는 것이다. 질투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얼마나 비참할지 우리는 거울이 없어도 잘 안다. 평균만큼 하자는 말, 적당히 하자는 말은 사실 나는 지금보다 더 열심히 하고 싶지 않고, 네가 괜히 열심히 했다가 내가 게을러 보이는 것이 싫다는 말을 담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팩트를 기반으로 한 맞는 말을 계속 듣고 살아야 한다. 하지만 그게 친구 일 필요는 없다 라는 것이 내 의견이다. 만약에 예를 들어 친구가 ‘나 강남에 집 사고 싶어.’라고 한다면, 우리 머릿속에서는 다음과 같은 리스트가 눈 깜짝할 새 나열될 것이다. 일단 ‘미X’ 이란 단어를 음소거 한 다음 써보자면 다음과 같을 것 같다.


“야, 니 월급 모아서 언제 사냐, 꿈 깨.”

“거기 차도 많고 복잡하고 공기도 안 좋잖아.”

“너 거기 가면 상대적 박탈감 들 껄?”


이 모든 것이 사실일지라도 정말 나는 순수하고 깨끗한 마음으로 친구를 위해 말해주는 걸까? 연기를 잘해서 들키지 않은 지라도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우리 같은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살아야 되는 거야.’라는 동질감을 깨고 싶지 않은 마음이 있지 않은가?


이렇게 주저하는 친구를 주저앉히지 말고 엉덩이를 뻥 걷어차 주는 사람이 되어보는 건 어떨까?


어른이 될수록, 타인의 슬픔에는 깊은 공감을 표하지만. 타인의 성공을 진심으로 기뻐해 주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안다. 진짜 친구는 내가 잘 될 때 들어 난다고 하더라. 그래도 성공은 전염되기 마련이니, 내 친구가 잘 된 것에 배 아프다 라는 소견보다 이제 내 주위에도 잘난 놈이 하나 있게 되었네 라고 자랑스럽게 생각해 보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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