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보면 모든 것을 들어주는 친구가 있다는 말은 모든 것을 말하는 친구가 존재하기 때문에 존립하는 단어이다. 내가 친구에 대해 가지고 있는 큰 오해 중에 하나는 바로 이것이었다. 친구라면 숨기는 것이 없어야 한다는 것. 이 말은 지금 생각해 보면 약간 섬뜩하게 느껴지기도 하는 것 같다.
나는 예전에 비밀이 없는 사이 만이 많은 친구 중에 진짜 친구라고 생각했었다. 이 믿음에서 비롯된 것이 교환일기가 아녔을까 싶다. 교환일기에 모든 것을 털어놓아야만 진짜 친구라는 공식이 성립했을 때, 아이러니하게 비밀을 담는다는 교환 일기장 자체는 비밀이 될 수 없었다. 즉, 진짜 친한 친구와 교환일기를 쓰고 있다는 것은 진짜 친구가 아닌(?) 그들을 슬프게 했으며 미안한 마음에 한 명, 한 명 끼어주다 보면 늘 그 일기장은 만인의 일기장이 되어 흐지부지 되고는 했다.
참 비밀이라는 것은 만들기가 어려운 것인지 지키기가 어려운 것인지 알 수가 없다. 학창 시절의 대부분의 비밀은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누구이며, 네가 좋아하는 사람이 누구 이냐에 대한 것이었었는데, 우습게도 친구와 비밀을 공유해야 하기 때문에라도 누군가 좋아하는 사람을 정해야 할 것 같은 느낌까지 들었던 것 같다.
어른이 되어서도 나는 이 공식을 꽤 오래 유지하고 싶어 했다. 아니 친구에게는 비밀을 말할 수 있는 것이라고 믿고 싶었다. 아무에게도 비밀을 말할 수 없다면 혼자 간직하기엔 너무 인생이 무겁고 가혹하지 않은가 라고 생각했건만, 반대로 생각하니 누군가의 비밀을 들어줘야 하고 더 나아가 그것을 함구해야 한다면 그것 또한 너무 가혹한 것 같다. 대부분 그러하기 때문에 함구라는 후속조치는 생략 혹은 지키려고 노력했음에 머물게 되는 것 같다.
고민하는 모든 것을 말하면 정말 속이 시원해지는 순간이 있긴 하다. 그런데 어른이 될수록 모든 것 아니, 개인적을 나누는 것의 시원함은 후회를 이기지 못했던 것 같다. 대놓고 반역을 꾸며서 저 친구가 이걸 그 사람한테 말하면 어쩌지 라는 상황을 만든 적은 없지만, 때로는 어떤 말을 해놓고 저 친구가 나를 이상하게 여길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은 종종 들었던 것 같다. 혹은 나의 나약하고 부정적인 어둠을 들켜버린 것 같은 부끄러움이랄까.
진짜 친구라면 모든 치부를 다 보아도 멀어지지 않는다고 이론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솔직히 인간은 안 믿기로 결정하는 게 가장 편하고 정확한 것 같기도 하다. 다만 알면서도 또 한 번은 믿어보고 싶은 내가 참 나도 싫다. 참, 민망하게도 친구는 멀어지고 잊히는 프로세스가 이제 적응이 되는데, 그들에게 나의 마음의 추함에 대해서 말했던 부분은 잊히지가 않는다. 이런 시행착오를 통해서, 결국 나에 대해서 하는 말은 점점 줄어들게 되는 게 어른인가 보다. 그렇게 점점 자신에 대해 말하지 않다가 우리는 결국 남의 말을 하는 사람으로 전락하기도 한다.
사실 우리는 친구를 만났을 때 연예인이나 재벌 걱정을 많이 해준다. 그들의 이별 상세 프로세스라던가 빚이 얼마인지까지도 아는 것을 봐서 우리는 우리 서로보다 연예인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그렇지만 우리가 그들의 이별에 같이 울어주거나 그들의 사업 대박에 같이 기뻐해주지는 않는다. 그들과는 친구가 아니니까 말이다. 그러니 모든 것을 다 알리거나 알리지 않아도 우리는 썩 괜찮은 친구 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내가 아는 부분에 대해 진심으로 같이 기뻐해 주고 같이 슬퍼해주는 것은 서로의 양말 사이즈와 통장잔고 까지 알지 않아도 할 수 있는 부분인 것 같다.
어느 날 유 퀴즈를 보다가 인상적인 장면이 있었다. MC 들은 '어디 사세요? 지금은 누구랑 사세요? 가족이랑 사세요?"라고 묻자 미국 출생이시지만 한국으로 귀화한 게스트 분은 이렇게 대답하셨다.
'그런 개인적인 질문은 하지 말아 주세요'
오, 그 순간 뭔가 굉장히 멋진데 라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특유의 오지랖이 넓은 우리나라 사람들은 그 사람에 대해서 그런 것 까지 알아야 편한 사이가 되고 친해지는 즉 진실된 대화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할 때가 많은데 그분은 그것을 딱 쳐내신 것이었다. 그분의 개인정보를 알지 않고도 그 뒤에 그의 답변들을 몰입해서 들을 수 있었다는 면에서 마음을 나누는 데는 TMI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다시 한번 할 수가 있었다.
모든 것을 다 알려주려는 마음도 알고 싶은 마음도 필요하지 않다면, 나는 다시 한번 친구를 사귀어 볼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