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넌 OO는 있잖아.”

by 스테이시

세상에서 가장 괴로운 것 중에 하나가 불통일 것이다. 아예 소통이 단절이 돼 버린 것보다, 상처가 곪아서 스치기만 해도 아픈 상태가 더 힘들 것이라 생각하다. 그게 함께 있어도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뜻의 불통이 아닐까 싶다. 말 그대로 일촉즉발.


더 함께 하고 싶은 친구의 요건은 말이 통하는 친구이고, 무슨 말을 했을 때 같이 웃어주고 같이 울어주는 때로는 같이 욕해주는 친구일 것이다. 사실, 다들 어릴 적 기억을 떠올려 보면 인생의 한번쯤은 이런 친구를 가져 보았으리라 생각한다. 그런 친구가 있을 때는 집에 있는 시간보다 친구와 있는 시간이 편하고 좋았다. 엄마, 아빠는 내가 무슨 말을 해도 공감해주기 어려운 시기가 있으니 말이다.


나는 말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들어주는 역할을 즐겨한다고 착각하던 때가 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보니 내가 말을 많이 안 할 뿐인지, 이야기의 주도권을 가져오고 싶은 욕망을 발휘할 때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주로 내 인생이 힘들 때 그랬다. 아예 너무 힘들면 말도 안 나오지만, 어정쩡하게 힘들 때는 나도 시덥지 않은 시사 거리를 들먹이며 네거티브를 시전하고 있더라. 별 의미 없는 이야기라도 누군가 들어줬으면 하는 욕심은 때로는 나 스스로를 추하게 보이게 하지 않았나 생각도 해본다.


인간이 힘들 때는 사실 조금 힘들다, 힘들다, 많이 힘들다로 나눠지지가 않는다. 힘든 건 그냥 힘든 거다. 제삼자는 객관적으로 누가 더 힘들겠다 라고 판단해 볼 수 있지만, 나 자신의 문제에서는 그런 능력이 백지화된다. 예를 들어, 구직하기가 힘들어서 괴로운 사람과, 직장에서의 문제로 괴로운 사람이 있다고 해보자. 당신은 누가 더 힘든 것이라고 판단 내릴 수 있는가? 지금 나는 내가 둘 중에 어느 상황에 속해 있기 때문에 객관적 판단이 어려운 것 같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인간은 힘들면 이 세상에서 내 인생이 제일 지랄 맞다고 생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내가 힘들 때, 아 저 멀리 그래 나보다 더 힘들게 사시는 분들이 계시지 라는 생각이 도무지 들어오질 못한다는 것이다.


근데 이게 어른이 되면 어떻게 돌아가는가 하면, 세상에서 제일 힘든 내가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하는 순간 들어주길 기대하는 사람이 또 다른 세상에서 가장 힘든 사람인 것이다. 이 현상을 현실로 옮겨야 예를 들자면 이런 것이다.


*사례 1*

“야, 나 요즘 너무 힘들어. 회사에서 실적 압박이 너무 심해.”

“야, 그래도 너는 멀쩡한 회사라도 다니지. “

*사례 2*

“집 값이 너무 비싸서 신혼집 구하기 너무 힘들어.”

“야, 그래도 넌 결혼할 대상이라도 있잖아.”

*사례 3*

“아 어제 모의고사 수학 망했어.”

“야, 그래도 넌 영어는 1등급이잖아.”

*사례 4*

“요즘 살찐 것 같아서 스트레스받아.”

“넌 그래도 55 들어가긴 하잖아.”

*사례 5*

“내 클럽이 비싼 게 아니라서, 공이 멀리 안 나가는 것 같아.”

“넌 골프 다닐 시간이라도 있구나.”

*사례 6*

“ 우리 애가 그렇게 원했던 서울대를 떨어져서, 어쩔 수 없이 K대를 갔어. “

“......”


이렇게 사례를 나열하다 보면 이 책을 모두 채워도 페이지가 부족할 것이다. 사실 각 대화에서 첫 번째 화자의 말은 우리도 종종 했던 말일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러나 각 대화에서 두 번째 화자의 말은 대부분 머릿속에서 팝업 되었으나 입 밖으로 나오지 않은 말이었을 것이라 추측해 본다. 마지막 대화의 말 줄임표처럼 말이다. 보통 이 상황들에서 두 번째 화자의 정석적인 대답은


“아, 그래. 많이 힘들었겠다.”


이겠지만, 답을 몰라서가 아니라 저 정도 대답으로도 맞장구 쳐주지 못할 정도로 지쳐있는 것이 현대를 사는 우리이다. 우리는 그래도, 눈치라는 것을 사용해서 상대방이 불편하게 생각하는 말을 안 하려고 하지만, 또 이게 친구라는 사이 일 때는 이 기제가 느슨해진다. 우리는 친구니까 이해해 주겠지 라는 마음에 말이다. 그런데 인생은 무언가 획득해 가는 것은 적은 것에 비해 과업 수행 난이도가 점점 올라가기 때문에, 사람이라는 것이 이해심 있는 사람으로 평생 남는 것은 불가능한 것 같다.


그래서 “그래도 넌 ~ 있잖아.”라는 마음이 음소거되며 플레이되는 순간, 대화는 단절되어 간다. 나의 힘듦을 그저 공감받고 싶었던 것뿐인데, 마치 나의 힘듦이 배부른 투정 같이 느껴지는 순간 우리는 친구와 거리를 잴 수 있게 된다. 이렇게 친구가 사라져 간다.


힘든 우리가 만나 힘든 친구가 될 필요까지는 없으니 말이다. 말 그대로 Let it go 하는 것도 방법이겠지.


저 문구를 이렇게 활용하면 우리가 여전히 친구일 수 있지 않을까?

“야, 그래도 넌 이렇게 들어주는 친구라도 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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