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정의가 시급해, 친구라는 단어

by 스테이시

브런치는 매년 나에게 글을 쓰게 한다. 올 해는 넘어가고 싶었는데 또 쓰고야 말았다. 글로 쓰고 싶은 이야기는 너무 많지만 늘 망설이는 이유는 진실되게 글을 쓴다는 것이 대부분 나의 지지리도 못남을 숨길 수 없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번 소재도 그랬다. 그러다 그래도 마음속에 있는 것을 글자로 옮겨야겠다고 마음먹은 이유는 '이 나이에 친구가 없다' 아니 '없어졌다'라는 고민을 나만 하는 것이 아님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나만 친구가 없나?"

사실 이 제목을 달기 전에는 방대한 논문 쓰듯이 대한민국에서 친구가 사라져 가는 이유에 대한 보고서 같은 글로 흘러가고 있었다. 버퍼링이 느껴질 때쯤, 나는 이내 깨달았다. 때로는 친구, 때로는 호구로 살면서 받았던 상처를 끄집어내어 치유받고 싶어서 시작한 글이었으면서 철저히 나의 바보 같음을 감추려고 애쓰고 있다는 사실을. 그때 잠시 고민했다. 포기할까, 엎어서 처음부터 다시 쓸까. 얼마나 더 솔직해져야 할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지만, 일단 첫 번째 두려움은 이겨냈다. 두 번째 두려움은 이 글들을 한 번에 발행을 눌러야 할 때 발생할 것이다.

이렇게 마지막 장까지 달려왔다.

아주 어릴 때 우리는 모두 친구와 사이좋게 지내야 하며, 싸우면 안 된다고 배웠다. 어떻게 보면 친구라는 단어에 대한 교육은 그게 다라면 다였다. 싸우지 않는다는 것이 영원히 유지된다는 뜻은 아니라는 것을 누가 알려주었다면 그때 알아들었을까? 우정이라는 단어가 유니콘을 타고 함께 뛰어노는 듯한 이미지가 아니라 퇴근 후 집에 와서 꽉 찬 빨래 통을 보는 듯한 실제 생활임을 왜 누구도 말해주지 않았을까?

사실, 이 모든 것들은 누가 가르쳐주지 않더라도 어른이 되면서 알아차려야 했을 것들이었다. 아, 어쩌면 몰랐다는 말보다는 알면서 인정하고 싶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아기한테는 우유가 가득 찬 젖병 하나가 행복이고, 어린이 에게는 최신 장난감을 소유한다는 것이 행복일 것이다. 수험생에게는 시험 합격이 행복이고 직장인에게는 승진 혹은 내 집 마련이 행복인 것처럼, 모든 단어는 시기에 따라 정의가 변하는 게 정상이다. 우리가 친구라는 단어에게 고정 역할과 절대 불변의 진리로서 존재해주길 기대했었던 것이라면 너무 가혹했던 게 아닌가 생각해본다.

교복을 입고 팔짱을 끼고 거리를 같이 누벼줄 친구는 이제 없지만,

전철이 끊길 때까지 치킨을 뜯으며 내 고민이 네 고민인 것처럼 밤을 새워줄 친구는 이제 없지만, 나는 여전히 친구가 있다. 이 시기를 같이 보내고 있는.

달라진 것이 있다면, 이들을 잃게 될까 두려워하며 만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누군가와 만나고 멀어지는 것, 그것이 삶이었고 삶이 될 것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게 되었다는 뜻이다. 만남과 헤어짐 들은 누구의 잘못도 아녔으며, 시간에 따라 자연스럽게 멀어졌다면 그것 또한 축복 중에 하나였으리라 생각한다. 원래 추억은 기억이 시간이 지나 미화된 것이니, 그 우정들은 과거됨으로 미화될 자격이 생긴 것이다. 이제 모든 걸 주지 않아도, 모든 걸 다 말하지 않아도, 언젠가 헤어질 줄 알면서도 친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안다.

친구라는 단어에게 주어졌던 고상하고 영원하며 숭고해야 한다는 짐을 이제는 벗겨주려 한다. 그러므로 우리 또한, 평생 해야 되는 친구라는 역할의 무게에서 자유해지길. 돌아보면, 내가 친구들에게 지쳐버렸고, 다시는 상처 받고 싶지 않아 몸을 사리는 이 모든 것들이, 친구가 나를 할퀴어서가 본질이 아니라 내가 그들에게 어떤 친구가 되어줘야 한다는 기준을 가지고 나 스스로를 압박한 것에서 시작되지 않았을까 생각이 든다.

좋은 친구가 또 좋은 사람이 되길 포기하려는 마음에 이 글을 썼다.


나 이번엔 성공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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