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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우리 집은 어디에] 임대주택 꿈의 평수 59형

임대주택 꿈의 평수 59형!

by 스테이시

정말 우여곡절이라는 말도 아까울 정도의 과정을 겪은 나의 장기전세 59형 당첨 수기로 나는 20년 아니 적어도 10년은 집 걱정 없이 살 수 있다고 확신하며 연지타운, 천왕 2 지구 1단지 59형으로 입주를 했다. 같은 단지 49형에서 59형으로 옆옆동으로 이사를 하는 것이었기에 남편은 회사를 가고 아이들은 어린이집에 가고 혼자 이사를 진행했다.


첫째에게는 태어나서 두 번째 이사였고, 둘째에게는 자신이 태어난 집을 떠나는 큰 이사였지만, 지금 물어보면 그 집은 기억이 안 난단다.^^; 그렇지만, 그 집에 사는 모든 순간들에 우리 가족은 감사했고, 그 집을 방문하는 햇살까지도 사랑했다. 지금까지 살아왔던 집중에 가장 집들이를 많이 한 집이었기도 하다. 그만큼, 그 집은 내가 설계하고 발주해서 지은 것처럼 내 마음에 흡족했다. 우리 아이들은 동요를 개사해서 연지타운 노래를 만들어 부르곤 했다. 그만큼 우리 가족 에게는 정서적 뿌리 혹은 고향 같은 느낌을 선사한 곳이었다.


이전 세입자는 준공 후 1년 사시고 이사 가셨다는데, 집이 깨끗해서 입주청소 업체를 부를 필요도 없었다. 시어머니와 둘이 청소를 했는데, “여기가 너네 진짜 집이면 좋겠다” 라면서 어머니는 좋아하시면서 아쉬워하셨다.


지금 생각해도 내가 돈이 있다면 그 집은 정말 사고 싶은 집이었다. ^^


그 집은 분양가는 공공분양으로 2억 5천이었는데, 그 당시 3억 9천이었고 그것도 식겁했지만, 글을 쓰는 현재는 5억을 훌쩍 넘기고 있다. 하하하. 그렇지만, 여전히 사랑스러웠던 그 집의 이야기를 좀 더 해보자면, 이제 우리 집은 복도식이 아닌 계단식이었고 남서향으로 해가 너무 예쁘고 길게 잘 들어왔다. 이제 3점 이도 방을 갖게 되고 (물론 그 방에서 3점 이가 혼자 잠이 드는 이상적인 일은 발생하지 않았지만), 외출했다 가도 돌아갈 집만 생각하면 미소가 절로 찾아왔다.


이제 20년 살면 되겠지. 이 집은 100점 만점에 99점이었다. 왜 내가 100점을 주지 않았을까?

세상에는 더 좋은 집들이 많아서?


나는 좋은 집은 현재 우리 가정에게 의미 있고 유지 가능한 집이라는 정의로 이 책을 시작했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우리 가정이 이 멋진 집을 누리는 데 있어, 걸림돌이 되는 한 가지가 있으니, 어차피 그 당시 집을 사려는 계획이나 그림이 없었으므로, 내게 가장 무거웠던 것은 2년 뒤 다가 올 재계약해서 최대 5퍼센트의 보증금을 올려 주어야 할 것이 벌써 걱정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전세가 1억씩 뛴다고 할 때니 사실 1000만 원 미만의 돈을 올려주는 것은 실로 거저 같은 일이었다.


하지만, 외벌이 중소기업 재직자 가정에게 2년 동안 1000만 원을 저금한다는 건, 불가능에 수렴하는 일임도 자명했다. 나는 결혼하고, 내 옷을 산 적이 없었다. 외출했다가 3점 이가 내가 안고 있을 때 쉬야를 해서 옷을 버렸을 때 빼곤 말이다. 내 가방은 15년째 하나이다. 나를 아는 사람은 모두 알고 있는 까만 니콘 카메라 가방인데, 학부 때 전공수업 때문에, 아날로그 필름 카메라를 들고 다녀야 해서 산 것이었다. 사람들은 내 카메라 가방에서 기저귀가 나오는 것을 보고 빵빵~ 터지고는 했다. 주머니가 많은 그 가방은 지금까지 내 외출용 유일한 가방이니, 내가 씀씀이가 커서 돈을 못 모은다고 말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으로 사료된다.


물론, 결혼하기 전부터 절약이 몸에 밴 이상적인 캐릭터는 전혀 아니었지만, 내 앞 선글라스들을 읽어보면, 충분히 짠순이 아니 그 이상의.. 결제구조를 가져야 했던 것의 타당한 이유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더 이상 차상위계층은 아니었지만, 사실 차상위에서 조금 벗어난 소득 정도였으므로, 남편의 월급은 뻔했다. ^^


나도 같이 돈을 벌고 있는 현재는 돈에 대한 인식이 바뀐 점은 있지만, 여전히 나는 돈을 생필품 외에 지출을 허락하기에는 마음이 편치 않다. 내 동생은 나에게 가끔 삶의 여유를 가져야 한다며, 해외여행을 가자고 하지만, 내 입장에서는 재고해 볼만한 사항도 아닌 것이다. ^^;; 화장품 하나, 옷 한 장, 가방 하나 산 적 없는 미용실 가는 돈도 아까워서 혼자 몇천 원짜리 염색약을 이용하는 그런 재정운영을 하는 내가 한 달에 전세자금 대출을 갚을 수 있는 범위는 약 5만 원에서 많아 봐야 10만 원이었다. 전세자금 대출을 갚던, 다음 재계약비용을 모으던 한 달에 5만 원 아니 10만 원이라고 해도 내가 최대 모을 수 있는 비용은 240만 원이다. 그리하여 SH장기 전세라는 재계약 시 5퍼센트 이상 인상이 안 되는 환상적인 제도를 이용하고 2.2 % 라는 낮은 금리로 버팀목 대출을 받아 놓고도 마음이 조금씩 조금씩 물먹은 스펀지처럼 무거운 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나는 아주 계산적인 사람이다. 남편하고 연애할 때도 우리 결혼 날짜를 만약 1년 뒤로 정한다면, 나는 하루에 365분의 1 만큼씩만 당신 하고 친해지겠다고 했으니 말이다. 반면에 우리 남편은 나랑 정 반대로 긍정적이고 낙천적인 사람이니,


“혹시 알아 스테이시,

그전에 로또가 될 수 있으니”


라는 그에게 내 걱정은 뜬구름이었다. 그러므로, 꿈의 임대주택 59형 방 3개에 입주 한지 몇 달 채 지나지 않아서 나는, 또 다음 단계를 모색해 가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앞 동에 타워형 구조를 가진 분양세대가 부러워지기도 했었다. 그때는 생활권을 바꾼다는 계획이 없었으므로, 구로구 안에서 구치소 자리에 회자되던 뉴 스테이나 당첨 가능성은 희박했지만, 관심사였던 항동 공공분양 등을 생각했었다. 그 당시 그 정도가 내 최대 플랜이었다.


남편은 “스테이시 제발 우리 이사 온 지 얼마 안 되었으니 쉬엄쉬엄 해”라고 얘기했고, 난 나름 수긍하며 그 첫 번째 반응으로 중문을 달기로 했다. 중문으로 내가 20년 살 예정인 이 집을 완성할 참이었다. 그렇게 그 해 겨울이 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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