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가 다이어트를 (또) 선언하고 저녁에 걷기를 시작했다. 써야 할 논문, 읽을 책에 눌린 나는 집에 박혀있었다. 그렇다고 딱히 하지 않고 미룬다(하기 싫다고!). 안 되겠다 싶어 어느 날 한번 따라나섰다. 안양천을 돌고 왔다. 그사이 밤 10시가 되었고 두 시간여 (미니) 서재에서 뚝딱뚝딱 그날 남은 숙제를 마쳤다.
이때 둥 하고 깨달음이 왔다. 산책은 TV, SNS를 대체할 뿐 내 숙제 시간을 방해하지 않는구나. 집에 있으면 무심히 TV를 켜고 무심히 유튜브에 접속하고 그들이 내 시간을 가로채는 동안 무방비로 침을 흘린다. 어차피 숙제를 하지도 못한다. 머리를 가동할 하루치의 에너지는 한정되어 있다.
안양천을 고척 쪽으로 갔다가 오목교 쪽으로 갔다가 문래동 쪽으로 갔다가, 그날 내키는 대로 경로를 만든다. 문래동은 차로 가던 곳에서 걸어가는 곳으로 바뀌었다. 내 생체 기능만으로도 보고 먹고 마실 거리를 즐기는 반경이 대폭 늘었다. 몸의 쓰임이 재발견된다.
구청에서 안양천에 조성한 작은 공원의 흙길을 아내가 좋아한다. 본인 여동생이라고 마음대로 임명한 들고양이(두세 마리 된다)는 그러나 마나 유유히 개천 쪽 풀숲으로 사라진다. 두 번에 한번 꼴로는 개구리가 길을 막는다. 지가 공룡인 줄 네발로 엉금엉금 걷다가(두꺼비나 맹꽁이일지도) 잡으려면 폴짝 뛰어 몸을 숨긴다. 강아지들은 전용 놀이터에서 목줄 풀고 질주한다. 아내와 나는 고양이를 쫓느라 개구리를 쫓느라 질주한다. 아름다운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