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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by 이용수

#1.

단단한 인상의 신사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이어령 선생이었다.

1999년 경이다. 회사 IT본부에 혁신위원회라는 거창한 이름의 TF가 있었다. 젊은 직원들 주도로 조직문화를 활성화하자고 만들었다. 당시 나는 부위원장 아니면 총무였다. 명사 초청 강연을 기획했다. 올림픽공원 안에 있는 예식장 홀을 빌렸다. 사무실 가까이에 그만한 장소가 없어서였다.

주례 단상을 치우고 놓은 의자에 앉아 선생은 한 시간 반 동안 대본도 없이 쩌렁쩌렁하게 책 한 권을 써 내려갔다. 이미 60대 중반이셨다.


#2.

"내가 느끼는 죽음은 마른 대지를 적시는 소낙비나 조용히 떨어지는 단풍잎이에요. 때가 되었구나. 겨울이 오고 있구나… 죽음이 계절처럼 오고 있구나. 그러니 내가 받았던 빛나는 선물을 나는 돌려주려고 해요."

(출처 : [김지수의 인터스텔라] 이어령 마지막 인터뷰 "죽음을 기다리며 나는 탄생의 신비를 배웠네", 조선일보, 2019.10.19)

2019년에 선생은 항암치료를 마다하고 있었다. 목사인 따님이 먼저 돌아가시고 하느님을 믿게 되고... 그런 짧은 소식을 듬성듬성 듣던 터였다. 당대의 지성이 읊는 쓸쓸함은 범부가 가늠할 수 있는 최대치의 은유였다.


#3.

아내를 기다리며 서점에 들렀다.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김지수, 열림원, 2021)이 눈에 띄었다. 21년, 22년을 지나며 스물스물 내 안에 번지던 의문에 대한 답이 거기 있을 것 같았다. 김지수 기자는 2019년 선생과의 인터뷰 이후에 다시 선생과 매주 화요일 만나고 있었다. 책 속에서 선생은 1999년의 그분과 2019년의 그분을 오갔다. 나와 동갑내기(!)인 김지수 기자 내 질문을 곧잘 가로챘다. 어린 이어령이 어둠 속으로 던진 돌에 개구리들이 울음을 일제히 멈출 때마다 나는 침을 꼴딱 삼켰다.


#4.

"인간은 어쩌면 지우개 달린 연필이야. (...) 비참함과 아름다움이 함께 있고 망각과 추억이 함께 있으니 말일세"

"무문석과 화문석. (...) 리빙과 라이프. (...) 의식주와 진선미. (...) 자기 무늬의 교본은 자기 머리에 있어. 그걸 모르고 일평생 남이 시키는 일만 하다가 처자식 먹여 살리고, 죽을 때 되면 응급실에서 유언 한마디 못하고 사라지는 삶...... 그게 인생이라면 너무 서글프지 않나?"

"집이 아니라 길 자체를 목적으로 삼게나. (...) 꿈이 이루어지면 꿈에서 깨어나는 일밖에는 남지 않아. (...) 꿈 깨면 죽는 거야. (...) 죽고 나서도 할 말을 남기는 사람과 죽기 전부터 할 말을 잃은 사람 중 어느 사람이 먼저 죽은 사람인가?"

"일상이 수단이 아니고 일상이 목적이 되는 것, 그게 춤이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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