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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드 Oct 24. 2021

아파도 춤을 출꺼야

아픈 몸도 표현할 수 있는 몸이다



 집 근처 사거리에서 음악이 흘러나왔다. 등과 팔의 근육이 소심하게 리듬을 타며 들썩거렸다. ‘춤을 추고 싶다.’


 중학교 때 검정 랩스커트를 입고 토슈즈를 신고 사방이 거울인 무용실에서 시간이 빨리 흐르길 바라던, 헬스장 G.X. 최고 인기인 댄스 수업에 한 번 들어갔다가 춤과 나는 맞지 않는다고 확신했던, 이번 생은 춤과는 상관없다고 믿었던 나인데, 갑자기 춤을 추고 싶다는 마음이 꿈틀거렸다.


 그 갑자기는 연극 이후였다. 연극에서 춤을 췄다. 대본을 쓰면서 내가 아팠던 20년의 긴 시간의 이야기를 15분의 시간에 담기가 어려워서 오래도록 고민을 했다. 긴 재활과 변화의 과정을 압축적으로 보여줄 방법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춤은 빠빠(연출가)의 아이디어였다. 빠빠의 입에서 ‘춤’이라는 말이 나오자, 나는 놀란 표정으로 동그랗게 눈을 떴다. 빠빠는 침착한 표정으로 물에서 헤엄을 치듯, 요가나 운동을 하듯 움직이면 된다고 했다. 처음엔 놀랐지만, 꾸준히 운동을 했고 그 연장선에 춤이 있다고 생각하자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내 아픔은 움직임과 연결되어 있으니까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것들 몸으로 이야기할 수 도 있을 것 같았다.


 나의 최애 곡 중의 하나인 국카스텐의 <사이>에 맞춰서 춤을 췄다. 처음 몇 동작만 정해놓고, 나머지는 음악에 몸을 맡기며 내 감정을 따라서 춤을 췄다. 빠빠의 말처럼, 헤엄치듯 요가하듯 움직였다. 내 안에 숨어있던 감정들이 몸을 타고 흘러나왔다. 상실감에 아파하던 시간과, 무력하게 헤매던 시간을 지나 그 모든 시간이 나를 이루어 가는 과정이었음을 몸의 언어로 이야기했다. 그날 내가 어떻게 춤을 추었는지 세세히 기억이 나지 않지만, 반짝이는 조명 아래에서 통증이 있는 몸으로 나를 표현하던 미세한 전율을 내 몸은 기억하고 있었다.


 사회적 거리두기가 완화되자마자, 춤 수업을 등록했다. 전에는 무엇이 하고 싶어도  하기 어려운 이유를 먼저 찾았는데, 이제는 그저 하고 싶은 이유 하나를 붙잡는다. 몸이 부쩍 노화의 아우성을 치는 요즘, 하고 싶은 것들을 계속 미루다 가는 영영 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위기감 든다. 그 위기감이 오히려 망설임을 가볍게 만들기도 한다. ‘무릇 모든 시작에는 새로운 힘이 깃들어 있어서 그것이 우리를 지키고 살아가는데 도움을 준다.’는 헤르만 헤세의 말을 기억하며 춤을 배우기 시작했다. 새로운 시작을 향한 에너지가 나를 둘러싸고 있다고 생각하며 당당한 걸음걸이로 춤의 세계로 향했다.

 

 그 세계는 좌절과 즐거움을 동시에 안겨주었다. 몸의 균형을 맞추고 등과 꼬리뼈의 연결을 느끼며 움직이는 기본 동작을 연습할 때부터, 굳어있던 근육들이 저항했다. 짐 볼 위에 앉아서 동작을 하는데 선생님이 막대로 내 힙과 등을 살짝 쳤다. 그 위치로 힙과 등을 자연스럽게 이동하라는 뜻이다. 머리로는 아는데 몸이 마음대로 되질 않는다. 등을 바로 하니  갈비뼈가 들렸다. 이번엔 선생님이 갈비뼈를 손으로 내렸다. 전신 근육 경련으로 굳었던 내 몸에서 아직도 가장 딱딱한 곳 중 하나가 갈비뼈 근처이다. 딱딱해진 근육 탓에, 오랫동안 횡격막으로 호흡을 하지 못해 갈비뼈가 들렸다. 그동안 재활과 운동을 하면서 많이 좋아졌지만, 아직 굳어있는 근육이 많이 남아있기에 언젠가부터는 더 이상 좋아지지 않았다. 아파서 누워있었던 시간이 길었고, 자궁과 난소에 1kg이 넘는 혹을 7년 이상 달고 지낸 탓에 척추의 정렬이 오랫동안 무너지기도 했다. 내 몸의 단점을 인식하고는 있지만 근육 질환이 있는 몸이라 남들보다 더 많이 노력해도 고치기가 쉽지 않다. 코로나 때문에 한동안 밖에 나가지 못해서 운동을 제대로 하지 못했더니, 새로운 시도에서 내 몸의 문제점들이 속속들이 드러났다.


 하지만 문제점이 드러난다는 건 새롭게 움직이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아직 어렵고 어색해도, 새로운 방식으로 몸의 정렬을 느끼며 몸과 춤을 함께 알아가는 즐거움이 세포에 스며들었다. 온몸의 근육이 춤을 처음 만난 사람처럼 새롭게 움직였다. 마스크에 맺힘 땀을 닦고 집에 돌아오는 길, 등과 배를 당기던 통증이 한결 줄어들었고, 집중해서 새로운 동작을 한 근육들이 활성화된 탓인지 숨어있던 에너지가 솟는다.


 몸으로 무엇인가를 표현하고 싶었다. 아픈 몸도 표현할 수 있는 몸이라는 걸 스스로에게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잘 표현할 수 있는 몸이란 바른 정렬을 가진 몸이고, 중심이 견고한 몸이고, 유연하고 자연스러운 몸이다. 나처럼 근육에 병이 있는, 쉽게 굳어지는 몸이 접근하기에는 더 힘든 몸이다. 수업 끝나고 선생님은 자신의 몸을 더 꼼꼼히 봐야 한다는 말을 했다. 나는 어쩌면 내 몸을 너무 잘 알아서 한계를 절감하는지도 모른다. 시간과 노력을 들여 잘할 수 없는 걸 애써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무모함이 참 마음에 든다. 아파서 타협하지 않고 시도하는 시간이 활기를 불러온다.


 “심각할 필요가 없어요. 너무 심각하면 몸이 바뀌지 않아요. 지금은 기본 동작을 완벽하게 할 수가 없어요. 기본 동작을 완벽하게 하기까지는 아주 오랜 시간과 연습과 훈련이 필요해요. 지금은 음악을 타고 움직이는 게 또 하나의 연습인 거예요. 음악을 타고 움직이며 내 몸이 어느 공간으로 가는지만 알아도 내 몸이 활성화되고 감각이 살아나요.”


 시퀀스 연습 중간에 선생님이 음악을 끊고  말했다. 그 말을 듣자 여기저기서 피식 웃음이 나왔다. 여러 동작을 따라 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 심각해진다. 너무 못할까 봐 긴장하고 잘하고 싶어서 심각해진다. 앞의 선생님의 동작을 보면서 따라 하다가, 내가 틀리지 않는 것에만 집중하다 보면 어느 순간 음악이 들리지 않는다. 시작할 때는 음악을 타려고 하지만 어느새 음악이 배경으로만 흐르고 있다. 춤이란 음악을 타고 움직이는 것인데 동작을 완성하느라 바빠진다.


 선생님의 지적에 음악의 리듬에 몸을 맡기려고 팔다리에 긴장을 털어낸다. 내 몸의 중심이 음악을 타고 흐르는 느낌에 집중해본다. 중간에 잠시 박자를 놓치기도 하고, 왼발과 오른발이 바뀌기도 하고, 반대 방향으로 턴을 하기도 하지만, 춤을 처음 배우면서 실수하는 게 당연하지 않은가. 정확한 동작을 하는 것보다 음악을 따라 내 몸이 공간 속을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반복하다 보면 지금은 빠르게 느껴지는 리듬이 익숙해지는 날이 오겠지.


 삶의 많은 순간에서 그랬다. 실수하지 않기 위해 더 좋은 선택을 하기 위해 심각해지곤 했다. 그럴 때면 내 삶에 어떤 곡조와 리듬이 흐르는지 감지하지 못했다. 더디 흐를 때 종종걸음을 걷고, 경쾌한 리듬을 타야 할 때는 다리를 질질 끌었다. 통증에 사로잡혀 세포들은 경직되었고, 삶은 무미건조 해지고 흥과 여유를 잃어갔다.


 심각해지지 않는다는 건, 너무 잘할 필요 없다고 스스로를 편히 놓아주는 일. 삶은 연습이 없는 매 순간이 실전이기에 지나치게 진지해질 때가 많다. 하지만 실수이고 실패라고 생각했던 발자국들을 딛고 이만큼 와 있는 걸 보면, 후회가 되는 건 더 잘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더 즐기지 못해서였다. 잘하고 있는가 대신 흐름을 타고 있는가, 실수하지 않았는가 대신 새로운 것을 배웠는가. 춤을 며 스스로에게 하던  질문을 바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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