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가정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은 국가가 존재하지 않는 무정부상태에 살고 있다고 가정한다. 당연히 ‘대한민국’이라는 국가도 존재하지 않는다. 당신의 손에 도끼가 잡혀 있고 맨발에 가죽으로 된 옷을 입고 있다는 상상까지 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지금처럼 기술이 발달한 사회도 아니다. 굳이 인류의 역사에 맞춰본다면 원시사회 정도로 보면 된다(물론 내용의 전개에 따라 점차 문명이 ― 말도 안되게 드라마틱하게 ― 발달할 것이다).
모든 것은 개인들이 해결해야 한다. 말 그대로 각자도생이다. 지금 우리가 당연히 여기고 있는 국가의 보호도 없다(아직 어설픈 공동체도 형성되지 않은 단계라 가정한다). 아침에 눈을 떠서 잠을 청할 때까지 모든 일들은 당신이 알아서 처리해야 한다. 먹을 것, 입을 것, 그리고 잠자리 마련은 온전히 당신 몫이다. 당신을 구속하는 법 따위가 있을 리 만무하다. 당연히 회사도 없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출근할 필요도 없이 완전히 자유로운 상태에 놓여 있으니, 뭐 이런 상태도 나름 나쁠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당신이 어렵게 야생으로부터의 얻은 곡물이나 과실을 힘센 다른 인간들에게 뺏기는 일이 종종 발생한다. 가장 최악은 못된 인간들로부터 죽임을 당하는 경우다. 반대로 마음을 단단히 먹고 나보다 약해 보이는 다른 인간들의 식량을 뺏을 수도 있다. 물론 상대가 순순히 뺏기지는 않을 터이니 적당한 린치(?)는 필수다. 그래서 최대한 자신의 것을 지키고 다른 인간의 것들을 많이 뺏을 수 있도록 열심히 ― 큰 돌을 들었다 놓았다하며 ― 체력을 기르는 인간들을 사냥 중에 종종 목격한다.
다행히 당신은 식량을 ― 뺏는 능력이 아닌 ― 꽤 잘 모으는 능력을 가졌다. 식량을 빼앗기지만 않는다면 배고픔이란 애초에 당신과 어울리지 않는 단어다.
그러나 동물의 왕국과 같은 지금의 상황에서 일체 뺏기지 않기란 애초에 불가능하다. 다시 말해 피를 볼 수밖에 없다. 안 그래도 며칠 전 당신이 어렵게 채집한 사과 두 자루를 힘센 다른 인간에게 빼앗겨 크게 상심한 적이 있다. 그래서 거꾸로 당신도 어제 두 자식이 있는 한 인간을 위협해서 그가 가지고 있던 귀리 한 자루를 냉큼 빼앗아 버렸다. 당신과 그리고 당신 손에 들린 귀리자루를 슬픈 눈으로 번갈아가며 쳐다보던 어린 인간 둘이 자꾸 신경 쓰이긴 하지만 그래도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 한다. 야생에서 당신이 살아남기 위해서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