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시권에 대한 오해(2013. 6. 27)
인간의 '눈'은 매우 불완전한 기관이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말은 직접 보는 것만큼 명확하고 확실한 것이 없다는 뜻이지만, 사실 직접 보아도 실제와 다르게 보는 경우는 많다. 똑같은 것을 보고도 다른 이야기를 하는 사람을 두고 '눈이 삐었냐'라고 한다. 그래서 착시현상이라는 말을 한다. 하지만 우리는 모든 신체기관 중에서 눈을 가장 신뢰한다. 누군가가 자신이 전달한 정보를 의심하려 할 때 핏대를 세우고 흔하게 쓰는 말은 '내 눈으로 직접 똑똑히(?) 보았다'이다. 직접 보았다는 말에는 별로 반론을 제기할 여지가 없다. 보았다는 말 자체가 거짓이 아닌 이상 말이다. 그렇게 눈은 사물과 현상을 인식하는 데 있어서 최고의 지위를 누려 왔다. '관점'이라는 말... '가치관'이니, '세계관'이니, '역사관'이니 하는 모든 관념의 세계는 '시각'이라는 감각으로 표현된다. 그래서 우리는 직접 보이는 실물의 세계가 아닌 고고한 형이상학의 세계를 개념화하고 설명하는 과정조차 '눈'의 활동영역에 포함시킨다. 결국 '눈'은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보는 신묘한 기능까지 하는 것이다. '미시의 영역'이건 '거시의 세계'건 모두 보지 않고 가늠하되 본다고 표현한다. 그렇게 '눈'은 어마어마한 책임감에 짓눌려 혹사당해 왔고 그리하여 무지막지한 편견을 쏟아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착시'란 시각에 관하여 생기는 착각을 말한다. 우리가 '시각'의 영역을 터무니없이 넓힌 탓에 '착시'는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 더 광범위하고 더 신랄하고 더 처참하고 더 과격하고 더 무식하고 더 대범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그 의도적인 은폐 내지는 왜곡이 밝혀졌을 때 '착시'라는 일반적인 현상에 기대어 악의적 범죄를 또다시 은폐하고 왜곡한다. 결국 '눈'은 명확한 진실을 확증할 때도, 확인되지 않은 추정을 간주할 때도 공히 편의적으로 그리고 매우 자의적으로 활용된다.
'보다'라는 신성한 감각을, 그 자체만으로도 경이로운 축복을, 인간의 추악한 음모의 수단으로 더럽히는 인류에게 어떤 벌이라도 내려지지 않을까 두려울 따름이다.
'눈'과 관련해서 언뜻 떠오르는 단어들을 모아 보았다.
멸시 : 하찮게 여기거나 깔봄
천시 : 업신여겨 낮게 보거나 천하게 여김
응시 : 눈길을 모아 한 곳을 똑바로 바라봄
주시 : 어떤 목표물에 주의를 집중하여 봄
사시 : 눈을 모로 뜨거나 곁눈질로 봄
'보인다'는 기능을 내세워 누군가를 '멸시'하지도, '천시'하지도 말 것이며, 누군가 다가와 말을 건넬 때는 지긋이 '응시'해주고, 쉽게 이해되지 않는 현상을 접했을 때는 충분한 시간을 두고 예의 '주시'해야 하며, 비록 '사시'를 타고났더라도 상대를 삐딱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잘못은 범하지 말아야 하는 것을... 멸시도 천시도 '시선'에서 비롯되었다면, 사람이 달라 보일 때는 차라리 '눈'을 감아보자.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는 사람은 '통찰력'이 있다고 한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았다고 우기는 사람은 '사기꾼'이다. 보이지도 않는다고 하여 허위로 떠드는 것은 손바닥으로 숲을 가리는 양치기 소년과 같다. 당신의 결백은 역사가 증명해 주는 것이 아니라 '진실'이 입증한다. 두고 보자는 이가 두렵지 않은 까닭은 현실의 불리함을 모면할 수단으로 예측할 수 없는 미래를 이용해 협박하기 때문이다. 진정 두려운 사람은 협박하지 않는다. 현실로 체험시켜 준다. 그것도 멀지 않은 미래에.
서울시립미술관에서 '고갱 특별전'을 하고 있다. 여름휴가 중에 갈 요량으로 주말의 유혹을 겨우 뿌리치고 있다. 무엇하나 열렸다고만 하면 백화점 정기 바겐세일처럼 인파에 휩쓸리는 나라에 살고 있는 탓에 몇 해 전 큰 맘먹고 딸아이와 찾은 '샤갈전'을 망쳐 버린 안타까운 기억이 남아 있다. 이번에는 최대한 사람 드문 날과 시간을 고르기 위해 벼르고 있다. 인간의 오감을 만족시키는 장르는 예술에서 요리까지 다양하지만, 현란한 동영상에 익숙한 세대인 탓에 영화를 빼고 그림을 볼 겨를이 없었는데 언제부터인가 정지된 영상과 이미지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눈'을 떴다고 해야 하는지. 현상을 포착하는 '사진'도 포착한 현상을 묘사하는 '그림'도 행복하게 감상해 볼 나이가 되었나 보다. 그렇게 '눈'에 감사하며 살자. '눈'을 악용 내지 오용하려 들지 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