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의 신호를 놓치지 않기(2020. 11. 20)
1. 기억이나 의식 따위가 자꾸 잠깐씩 흐려지다.
2. 불빛이나 별빛 따위가 자꾸 어두워졌다 밝아졌다 하다. 또는 그렇게 되게 하다.
3. 눈이 자꾸 감겼다 뜨였다 하다. 또는 그렇게 되게 하다.
'깜박거리다'의 사전적 의미는 이렇게 세 가지로 구분된다. 쉽게 말해 그 대상이 기억이든 빛이든 눈이든 모두 스위치가 온/오프 상태를 반복하는 현상을 가리킨다.
나는 자동차가 좌회전 또는 우회전을 하기 전에 주변의 차량에 신호를 주는 사이드 램프의 깜박거림을 좋아한다. 특히 지금과 같이 현란한 디지털 장비로 무장한 스마트 자동차가 등장하기 전에 아직은 아날로그 감성을 간직했던 기계식 부품을 사용하던 옛날 자동차의 깜빡이등을 사랑한다.
아주 어릴 적 가끔씩 얻어 타게 되는 택시 안에서 나는 늘 깜빡이등의 소리와 그 깜박거림에 집중하곤 했다. 운전기사의 핸들과 사이드바 앞 전면부에 나타나는 녹색 화살표의 깜박거림은 좌회전 신호를 받을 때까지 계속되었다(그때도 대부분의 택시 기사는 우회전 시 깜빡이등을 잘 켜지 않았다. -.-;;;). 깜빡이등이 작동할 때에는 기계식 효과음과 함께 점멸하는 녹색 화살표가 유난히 인상적이었던 기억이 난다.
이것이 얼마나 깊이 각인되었던지, 나는 1차선에 대기하는 택시 안에서 좌회전 신호가 들어오지 않기를 바라곤 했다. 지금도 기계식 키보드를 사랑하는 나의 취향은 녹색 화살표가 점멸하면서 들리던 기계음이 기계식 키보드의 타격 음에 가깝기 때문일 것이다. 대학에 들어가 처음으로 운전면허를 취득했을 때 아버지 차를 몰고 나가 이유 없이 좌회전만을 반복하면서 같은 자리를 맴돌기도 하였다.
불빛의 깜박거림은 밝음과 어두움 사이를 오고 가면서 사람들에게 각성의 기회를 부여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계속 빛이 있거나 어두움만 있다면 우리는 변화를 감지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것이 명과 암을 반복하게 되면 무언가 일상적이지 않은 상태라고 인지하게 되는 것이다. 형광등이 깜박거리는 것은 등의 수명이 다했거나 점등관이 고장 났을 가능성이 높다. 횡단보도 녹색 등이 깜박거리는 것은 곧 빨간 등으로 바뀔 것이라는 신호다. 차량의 사이드 램프 역시 이 차는 직진하지 않고 좌회전/우회전/유턴을 할 거라는 사실을 주변에 알리는 것이다.
이렇듯 모든 깜박거림은 곧 발생하게 될 변화를 미리 알려주는 전조와 같다. 그래서 사전적 의미처럼 기억이 깜박거리거나 눈이 깜박거리는 것도 머지않아 발생할 일들을 예고하는 것이다. 안타까운 것은 빛의 깜박거림인 경우와 달리 기억이나 눈의 그것은 더 부정적인 미래가 닥칠지 모른다는 사실이다. 기억의 깜박거림은 노화현상일 수도 있지만 치매나 알츠하이머의 전조이기도 하며, 눈의 깜박거림은 가벼운 스트레스와 마그네슘 부족이 아니라 뇌졸중, 즉 풍을 맞을 수도 있다는 얘기다.
차량의 화살표나 횡단보도의 신호등이 불길하게 느껴지지 않았던 이유는 그 점멸하는 색상이 녹색이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붉은 등이 그러했다면 또 달랐을 것이다. 이와 같이 모든 깜박거림은 다소 부정적인 미래를 암시하는 것이고 우리는 그 경고를 지나쳐선 안된다.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이 초래될 수 있기 때문이다.
나의 눈 밑 경련은 가끔씩 잠복기를 거치긴 했지만 무려 20년이 넘도록 지속되었고, 이제는 스스로의 기억도 온전히 믿을 수 없을 때가 잦다. 돌이켜보면 다이어리에 빼곡히 메모하는 습관이 단순히 내가 필기광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이렇게 나의 몸과 정신은 오랜 시간 동안 깜박거림을 통해 앞으로 맞닥뜨리게 될 위기를 알려주었지만, 나는 그 경고를 지나쳤거나 깜박거렸다. 가끔은 하얗게 잊었다.
삶은 늘 깜박거린다. 행복과 불행 사이를 깜박거리고, 기쁨과 슬픔 사이를 깜박거리며, 평안과 불안 사이를 깜박거린다. 모든 스위치에는 수명이 있다. 이를테면 충전과 방전을 오가는 휴대폰 배터리는 그 수명이 다하면 영면의 순간을 맞으며, 인간의 운동능력을 좌우하는 온몸의 관절은 어느 순간 제 기능을 하지 못하게 된다. 모든 스위치는 수명이 다하면 오프가 되며, 설령 잠시 온으로 유지되더라도 전원이 차단되면 본의 아니게 오프로 전환된다.
즉 스위치의 운명은 오프로 귀결된다. 모든 생명이 죽음으로 끝나듯이 말이다. 당신의 육체와 영혼에 나타나는 모든 깜박거림은 당신의 스위치가 오프로 향해 가고 있다는 신호다. 그런데 무엇을 망설인단 말인가? 결말은 확고하며 남은 시간도 얼마 없는데, 도대체 왜 당신은 멈추지 못하는가 말이다.
횡단보도 앞에서는 신호나 보행자의 존재 여부와 관계없이 일단 멈춰야 한다. 무언가가 깜박거릴 때도 일단 멈춰야 한다. 모든 깜박거림은 신호이기 때문이다. 당신의 무한질주에 보내는 정지신호이기 때문이다. 정지신호를 보면 무조건 멈춰야 하는 것이다.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게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꼭 그래야 하기 때문이다. 깜박거린다는 것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