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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그러움에 대하여

회전교차로를 대하는 자세(2017. 7. 20)

by 낙산우공

복잡하지 않은 교차로에 신호등을 설치하지 않고 중앙에 원형 공원을 배치하는 이른바 회전교차로가 늘어나고 있다. 예전에는 한적한 지방도로를 중심으로 설치되다가 요즘은 서울의 주택가에도 눈에 띄게 그 수가 증가하는 추세인 것 같다. 아직은 익숙하지 않은 시스템에 가끔 어느 차량에 우선권이 있는지 혼란스러워하는 운전자들이 많은 것 또한 현실이다.


가끔 지방 출장을 다녀서인지 나에겐 꽤 익숙해져서 일단 회전교차로에 먼저 진입한 차량에게 우선권이 있다는 것쯤은 알고 있지만, 퇴근길에 반드시 지나가야 하는 신촌기차역 앞 회전교차로에서는 여전히 차들이 뒤엉키는 경우가 빈번하다. 퇴근길에 아이를 픽업해야 하는 일이 잦은 나는 교통체증을 피해 우회하기 위해 이 길을 선택하기 때문에 우선순위를 착각하고 달려드는 차들을 보면 짜증이 나는 경우가 많았다.


선진국에서는 보편화되었다는 회전교차로에 대해 이렇게 인식이 부족해서 어떡할까 하는 걱정 아닌 걱정을 하면서 말이다. 그런 내가 어제는 무심코 그 무지한 부류의 편에 끼어드는 우를 범했다. 혜화동에서 성북동과 명륜동으로 갈라지는 삼거리에 얼마 전 회전교차로가 설치되었는데 이곳에서 무심코 휴대폰을 들여다보던 나는 교차로에 진입한 차를 인지하지 못하고 끼어들기를 하려 한 것이다. 물론 운전 중에 휴대폰을 쳐다본 내게 100% 과실이 있었음은 당연하다.


나에게 클랙슨을 연신 울려대며 멈춰 선 차량은 얼핏 보아도 고급 외제차였다. 유리는 온통 검은색으로 둘러쳐 있어 내부는 전혀 들여다보이지 않는 그 차량은 놀라서 멈춰 선 나를 앞서 가지 않고 그대로 정지한 채 또 클랙슨을 울려댔다. 분명 나에게 과실이 있었기 때문에 손을 들어 고개를 살짝 내리면서 미안하다는 신호를 보냈다. 물론 차량 안이 들여다 보이지 않아 상대 운전자의 반응은 알 수 없었다. 그런데도 그 차량은 출발을 하지 않더니 급기야 차 유리가 내려오기 시작했다.


나는 당연히 성미 고약한 아저씨가 분을 참지 못해 한바탕 욕이라도 퍼부으려고 하나보다 생각하면서, 실수는 했지만 오늘 운세가 썩 좋지 않구나 하는 불쾌한 마음이 들고 있었다. 그런데 내려진 유리창 너머에 보이는 운전자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30~40대로 보이는 백인 여성이었다. 커다란 선글라스를 머리 위에 걸치고 그 여인은 내게 손가락질을 하면서 알아듣지 못할 말을 빠른 속도로 내뱉고 있었다. 가까이 있었더라도 알아먹을 수 없는 외국어였겠으나, 분명 좋은 표현은 아니겠구나 싶은 말투였다.


조금 당황스럽기는 했지만, 성미 고약한 아저씨도, 매너 없는 아주머니도 아니었기에 썩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나는 다시 한번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사과했다. 뒤 차가 재촉을 해서인지 결국 그 백인 여성은 계속 알 수 없는 말을 내게 지껄이면서 출발을 했다. 그 차를 보내고 돌아오던 중에 문득 개운하지 않은 기분이 엄습해오기 시작했다. 조금 과장해서 그때 상황을 설명하자면 나는 그녀에게서 인종차별적인 적대감을 느낀 것이다. 그녀가 한국에 얼마나 오래 살았는지는 모르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의 운전습관이 그녀에게는 우호적으로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 적대적 감정이 축적되면서 어제의 나를 만나게 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던 것이다. 그렇게 조금은 시민의식이 떨어진다고 평가되는 한국의 개념 없는 운전자 중 하나로 내가 인식되었겠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내게도 슬며시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내가 그녀와 마주친 곳은 외국 주재관들이 모여서 사는 성북동의 외교관 마을에서 가까운 곳이다. 그녀의 차량이나 차림새를 봤을 때 아마도 그 동네 사람으로 보였다.


이 지점에서 어제의 상황을 다시 복기해 보면, 첫째 그녀가 유리창을 내리고 내게 얼굴을 드러냈을 때 내게 살짝 안도의 감정이 들었던 것도 일종의 인종주의다. 둘째 그녀의 속사포처럼 쏟아내는 외국어에 내가 잠시 주눅이 들었던 것도 일종의 인종주의다. 셋째 아무리 화가 났더라도 그녀가 나에게 보여준 반응은 상대에게 모멸감을 줄 만큼 과도한 것이었기에 그것 또한 인종주의다. 넷째 돌아오는 길에 그녀가 나를 인종차별적 시선으로 본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화가 난 것도 결국은 인종주의다.


내가 느낀 감정을 정확하게 설명하긴 어렵지만, 나는 간혹 나가게 되는 해외출장에서 인종차별적 시선을 느낀 경험이 있다. 그것이 나의 피해 의식 탓이라고 하면 할 말은 없지만, 그런 자리에서 내가 당당하지 못하고 위축되는 것도 인종주의에 예속되는 부끄러운 자화상이다. 이런 복합적인 감정들이 결합하면서 나는 어제 몹시 뒤끝이 좋지 않은 하루를 보냈다.


나이를 먹으면서 가장 경계하는 것이 고약해지는 성미다. 불합리하고 부당한 것을 참지 못하는 것은 정의감이지만, 그것이 유독 나에게 행해지는 것을 참지 못하는 것은 권위의식이다. "저 인간이 나를 뭘로 보고 저렇게 함부로 대하지?", "내가 누군지 알기나 해" 따위의 생각이 들었다면 말이다. 우린 모두 우월감이라는 모르핀으로 각박해져만 가는 현대를 연명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무시를 당하면 핏대를 세우며 스스로를 드러내는 것이 아닐까.


고약해지는 성미를 조금만 추스르고 너그러움을 갖추었다면, 어제와 같은 긴박한 상황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설령 내가 운전 중 실수를 했더라도, 그렇게 복잡하고 미묘한 감정을 다쳐가면서 이런 장황한 글을 쓰지도 않았을 것이다. 세상에 만연한 인종주의에 저항하기보다는 그저 탄력을 잃어가는 피부와 뱃살에도 불구하고 매력을 잃지 않는 너그러운 감성을 갖추면서, 그렇게 매력적으로 늙어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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