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생활이 없는 자에게 워라밸이란?(2013. 6. 11)
어릴 적 대부분의 남자아이들은 전쟁놀이에, 여자아이들은 소꿉놀이에 빠져 산다. 나는 냄비 뚜껑을 뒤집어쓰고 대장님을 따라다니는 똘마니가 싫기도 했고 다섯 살 무렵 신장염을 앓아 몇 달간 누워만 지내서 또래 동성친구를 사귈 기회를 놓친 탓에 옆집 동갑내기 여자 애와 소꿉놀이를 더 많이 하긴 했지만 일반적인 현상은 아니다. 전쟁놀이와 함께 남자아이들이 좋아하는 놀이 중에 '땅따먹기'가 있다. 맨땅에 사각의 테두리를 치고는 각자 한쪽 귀퉁이를 기반으로 돌멩이와 손 뼘을 이용해 땅을 넓혀 나가는 것이다. 결국 손 큰 놈이 장땡이지만, 누가 더 먼저 중원을 차지하는가가 승패를 좌우한다. 나는 이 게임의 양상은 좋아했지만 손에 흙 묻히는 게 싫어 집안에서 하는 땅따먹기를 고안해 냈다. 이름하여 '묵찌빠 삼국지' 놀이. 넓은 방을 균등하게 분할하여 책을 쌓아 영역을 구분한 뒤 영토를 맞대고 있는 아이와 일정 넓이의 영역을 걸고 묵찌빠를 하는 것이다. 여기에 소설 삼국지의 설정을 입혀 각자 위, 촉, 오 삼국중 하나를 고르고 황제가 되는 것이다. 아이들이 많으면 가위바위보를 해, 진 아이들을 모아 각 나라의 부하(모사)를 시킨다. 이들은 주군의 묵찌빠에 훈수를 두어주거나 대신 묵찌빠를 해주기도 하는데 땅따먹기에 기여한 바가 크면 영토가 넓어진 주군의 은덕으로 봉토를 받아 독립하기도 한다. 룰이 다르고 고도의 정신노동을 강요한다는 것을 빼고는 '바둑'도 땅따먹기다.
인간은 유희의 존재라고 한다. 매일매일 일만 하고는 못 산다. 개중에 워커홀릭이 존재하는 것은 그들에겐 일이 놀이인 탓이다. 안타깝게도 말이다. 워커홀릭 상사를 만나는 것이 불행한 건 일이 놀이인 사람이 일반적이지 않아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보편적 정서를 무시하고 일을 즐기라고 강요한다. 무례하기 그지없는 일이다. 일이 놀이인 사람은 다른 활동에서 즐거움을 찾을 수 없기 때문에 일에 과도하게 집착한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직장은 워커홀릭이 부담스럽다. 산업혁명 초기 공장을 돌리는 것만으로 돈이 되던 시절이 아닌데 무조건 생산해 내는 것은 어마어마한 낭비이자 환경파괴다. 그것이 제품이건 기획안이건 중요하지 않다. 육체노동이건 정신노동이건 효율성을 따지던 시대는 지났다. 이제는 부가가치가 일의 성패를 좌우한다. 무턱대고 일만 하는 것은 대개 회사에 해를 입힌다. 성실함에 반해 그들의 폐해를 직시하지 못하는 회사는 살아남지 못한다.
일을 미친 듯이 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이들에게 요즘의 대세는 부담스럽다. 사실 대세는 아니다. 대다수 오너들은 월급 받는 직원들이 노는 꼴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내가 말한 대세는 그것이 더 합리적이고 효과적이라는 뜻이다. 아무튼 무언가를 모의하고 기획하고 추진하고 성취해야만 존재감을 느끼는 이들은 급기야 어릴 적 놀이로 회귀한다. 전쟁놀이도 땅따먹기도 그것이 일정한 룰과 제한시간을 갖는 놀이이기 때문에 즐거운 것이지 기실 그것은 잔인하고 패악한 반인륜적 행위다. 자고이래로 전쟁과 남의 땅 뺏기처럼 후안무취한 행위도 드물다. 그 행위가 그저 놀이이기 때문에 용서가 되고 수용이 될 뿐이다. 안타까운 것은 즐겨야 할 일이 필요한 워커홀릭들이 이러한 어릴 적 놀이에 주목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들은 전쟁놀이와 땅따먹기를 직장으로 가져와서 없던 일거리를 만들고 그것에 의미를 부여하며 치열하게 논다.
이들의 놀이가 치열한 것은 문제 될 게 없지만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그 놀이에 연루된 타인에게 피해를 입히고 심지어는 사회에 커다란 물의를 일으키는 등 그 손실이 충격적일 때가 많다는 것이다. 그들은 무슨 대단한 대의명분이라도 있는 양 진지하다 못해 비장하다. 급기야 놀이에 깊이 빠져 현실을 놓치고 설정된 상황에 매몰된다. 꿈에 빠진 이들은 종종 깨어나서도 꿈속 상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잠꼬대를 하는 경우가 있다. 같은 이치다. 자신이 설정해 놓은 놀이의 상황을 현실로 받아들여 그들은 목숨을 걸고 매진한다. 인간의 뜬금없는 정치적 판단과 행위도 모두 놀이의 진화인지 모른다. 놀고는 싶은데 회사를 벗어나서 노는 방법을 모르고 나이 먹고 애들처럼 놀 수는 없고, 결국 고심 끝에 내린 결론은 어른의 세계를 가장하여 놀이를 하자는 것이다. 애들 놀이는 기껏해야 싸움으로 끝난다. 애들 싸움은 기껏해야 어른 싸움으로 끝난다. 그러나 일을 가장한 어른들의 놀이는 작게는 한 가정을 크게는 한 사회를 파괴한다. 그들은 항변한다. 일을 했을 뿐이라고. 아니다. 그들은 놀았을 뿐이다.
놀았을 뿐인데 엄청난 파장을 일으킨 이유는 그들이 직장에서 놀았다는 것이고 놀고 싶지 않은 이들을 끌어들여 놀았다는 것이다. 어릴 때 놀고 싶은 아이들은 놀이에 필요한 멤버를 구성하기 위해 골목골목을 누비고 다니며 엄지손가락을 펴 들고 이렇게 외쳤다.
"숨바꼭질할 사람, 여기 붙어라!"
하물며 아이들조차도 원치 않는 이들을 억지로 놀이에 끼워 넣지 않으며 가끔 적정인원이 초과하더라도 놀이에서 배제하지 않고 '깍두기'를 시켜줬다. 어른들은 일을 위장하여 개인적인 놀이를 즐기며 원치도 않는 이들을 억지로 놀이에 끼워 넣는다. 그들의 생사여탈권을 내세워서. 그 놀이의 정체는 대개 전쟁이거나 땅따먹기다. 그렇다면 여자아이들의 소꿉장난은 어떻게 변화했을까? 아이들의 소꿉놀이를 지켜보고 있으면 열에 아홉은 잔소리다. 그들의 역할은 대개 엄마다. 엄마 역을 맡은 아이는 애 아빠를 잡고 아이를 잡는다. 오늘의 엄마들은 그렇게 진화된 소꿉놀이를 한다.
아이에게는 아이들의 놀이가 있고 어른에게는 어른들의 놀이가 있다. 어른에게 놀 시간을 주지 않으면 직장에서 놀게 되는데, 직장에서는 허락된 놀이가 없기 때문에 결국 일을 가지고 논다. 한편 집에서 노는 엄마들은 가족 구성원을 가지고 논다. 그 놀이의 진화가 오늘날 대한민국의 직장과 가정에서 끊임없이 재현되는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놀 시간과 놀 장소였을 뿐이다. 직장과 가정에 가두지 말고 엄마와 아빠를 놀게 하자. 당신의 회사에 워커홀릭이 발견된다면, 반드시 그에게 휴가를 주어 노는 방법을 터득케 하라. 늦바람이 무섭고, 고기 맛을 알게 된 중은 감당이 안된다. 놀이는 진화해야 한다. 우리의 엄마, 아빠들의 놀이는 진화하지 못했고, 왜곡되었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못한 놀이는 변태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