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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낙산우공 Oct 03. 2021

만남에 대한 단상

인간관계는 어디까지 형식화될 수 있을까?(2019. 10. 16)

만남이란 단어가 설렘에서 부담감으로 바뀐 건 직장 생활을 시작하고부터인지도 모른다. 인위적이고 반강제적인 만남은 늘 불편함과 긴장감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일상적인 혹은 지극히 사적인 만남조차 가급적 기피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특히 어제처럼 나쁘지 않은 기억으로 남아있는 이들과의 조우조차 반가움보다는 피로감으로 다가오게 된 이유를 곰곰 생각해 보게 되었다.


어제는 옛 직장의 동료들과 아주 오랜만에 점심을 함께 하는 자리였다. 간간이 소식을 전해 듣거나 전화 통화를 하기도 했지만 굳이 시간을 내어 만날 만큼의 각별함은 아니었기에 만남의 제안이 다소 뜻밖이었던 것도 사실이다. 아마도 현재의 내 직장과 업무상 관련이 있거나 앞으로 관련이 있을 예정이고, 최근 이곳에 새로 합류한 예전 직장 동료와의 인연 등이 그들에게 애써 시간을 할애해야 할 명분이 되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현재 서로 이해관계가 얽힌 사안도 없었기에 만나지 아니할 이유도 없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약속이 잡힌 날부터 일주일 사이 문득문득 계획된 만남의 자리가 떠올랐고 기대감보다는 빨리 해치워 버리고 싶은 의무감으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다지 어려운 자리도 아니고 불편한 관계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왠지 모르게 조금씩 신경이 쓰이는 게 마음에 걸렸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고 1시간 남짓의 식사 자리도 별 탈 없이 화기애애하게 끝을 맺었다. 하지만 그날 오후 내내 만남의 시간을 복기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고 과연 이 만남이 내게 어떤 의미였나를 따져보게 만들었다.


먼저 6년 남짓한 공백의 시간을 메워야 했기에 서로의 안부와 주변의 근황을 이어 붙이는데 상당한 시간이 흘렀고, 서로의 얼굴에 비친 세월의 흔적을 이야기하며 자연스럽게 편안한 분위기가 연출되었다. 이야기가 조금 깊어지면서 공통의 주제를 언급해야 했기에 결국 내게는 까마득한 6년 전 옛 직장의 기억들을 끄집어내야 했고, 그들에겐 초유의 관심사이면서 나에겐 희미해진 과거의 인물들이 소환되기 시작했다. 그렇게 순식간에 지나버린 식사시간은 빈말인지 진심인지 알 수 없는 조속한 재회의 다짐으로 막을 내렸다.


이 짧은 만남이 내 머릿속을 복잡하게 하고 그 잔상이 남은 하루를 지배한 것은 무슨 이유였을까?

첫째, 익숙하지 않은 인물이 내 삶에 등장한 것에 대해 내 나름의 해석이 필요했던 것이다. 분명히 한때는 매일 마주하고 대화하던 사람들이었지만 이젠 공유하고 있는 것이 많지 않은 그들과 낯선 대화를 이어간 것이 내게 상당한 피로감을 선사하였다.


둘째, 정확하지 않은 과거의 이야기들을 지껄였던 것에 대한 자기 검열이 필요했다. 무언가를 끊임없이 떠들었지만 깊은 교감이 아니라 표면을 겉도는 화제들의 연속이었기 때문에 내가 혹시 말실수를 한 것은 없었는지, 눈치 없이 과하게 대화를 주도했던 것은 아닌지 하나하나 되짚어 보게 된 것이다.


셋째, 그들이 내 삶에 어떤 영향을 줄 것이며, 이 관계가 부활할 수 있을지에 대한 대답이 필요했다. 이들은 누구인가? 이들이 오늘 왜 등장한 것인가? 이들과 나는 과연 어떤 관계이며, 앞으로 어떻게 관계가 전개될 수 있을까? 그들은 나를 경계하는 것인가 혹은 다분히 의도를 갖고 접근한 것인가? 아니면 오늘의 만남은 그저 아무 의미 없는 일회성일까?


이런 질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면서 나를 피곤하게 만들었다. 결국 아무런 의미를 둘 필요가 없는 가벼운 만남이었는데 내가 너무 많은 생각을 하고 있다고 느끼는 순간, 그런데 왜 오늘 만나야 했을까?라는 또 하나의 의문이 뒤를 이었다. 나이가 들면서 삶의 패턴이 단조로워지는 것은 체력적인 문제도 있지만 그만큼 내 삶이 안정화되었다는 뜻이다. 하루가, 한 달이, 1년이 늘 반복적으로 진행될 수 있다는 것은 내가 어느 정도 안정적인 삶을 영위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편으로 그 안정적인 상태에서 가끔씩 벌어지는 비정상적인 상황이 나에게 상당한 에너지를 소모하게 하면서 피로도를 급격하게 상승시키고 있는 것이다. 하나 마나 한 만남은 하나 마나 한 말보다 공허하다. 그럼에도 하나 마나 한 만남이 쌓여 하루를 채우고 한 해를 채우는 사람들이 많아진다. 특별한 목적이 없는 만남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만나서 같이 밥 먹고 한 잔을 걸치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즐겁거나 필요하다고 느끼는 만남은 하나 마나 한 만남이 아니다.


그저 만나야 할 거 같아서 만나는 만남, 관계를 유지할 필요에 의해서 만나는 자리를 말하는 거다. 내가 피로감을 느끼는 만남이란 말이다. 언젠가 이 관계가 요긴하게 쓰일 것 같아서 혹은 확률은 낮지만 그렇게 쓰일 수도 있을 것 같아서 유지하는 만남과 관계는 이제 버리고 싶다는 얘기다. 요긴하게 그들이 필요하면 그때 연락을 하면 그만이다. 관계가 서먹해져서 무언가를 부탁하기 어렵다면, 그저 낯이 좀 더 익었다는 이유로 들어줄 수 있는 부탁도 아닌 것이다.


딱히 만나고 싶지 않거나 만날 필요가 없다면 조심스럽게 거절하는 요령을 배우고 싶다. 누군가에 대한 배려로 반갑지 않은 만남을 가질 순 있지만 그 배려는 한 번으로 족하다. 두 번째 정도는 결례로 보이지 않게 적당히 피해 가는 지혜를 갖고 싶다.


어제의 만남이 내게 계속 불편함으로 남았던 이유는 그들도 나만큼이나 가볍게 그 자리에 나왔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만나자고 한 것도 아닌데 그들은 왜 그 자리에 나왔을까? 그리고 나만큼이나 공허한 대화를 이어가고 있었을까? 그 의문이 내게 줄곧 불편함을 안겨주었다. 그들 역시 나라는 존재가 기껍게 반가운 사람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 의례적인 대화와 미소와 웃음과 인사가 나를 하루 종일 헷갈리게 하고 괴롭혔다.


그들은 나와 헤어진 시간 이후로 나를 생각하지 않았겠지만, 난 하루를 날렸다. 폐쇄적인 삶이 몹시도 그리운 날이었다. 기댈 곳이 없을지언정 고립되고 싶은 날, 시은 박계강 선생의 한시 한 구절이 떠올랐다.


"먹고사는 일이 내겐 정말이지 골칫거리, 강가에서 늙어가지 못하는 신세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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