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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낙산우공 Oct 01. 2021

설레임의 소진 이론

흥이 나지 않는 이유(2012. 9. 20)

사랑의 호르몬 도파민은 남녀가 서로 만나 매력을 느끼고 본격적인 연애로 발전하는 초기단계에 분비되는 호르몬이라고 한다. 이것이 육체적인 관계로 진화하면 옥시토신이 분비되며, 각각의 증상을 감정적으로 표현할 때 도파민은 설레임이나 열정, 옥시토신은 일체감 또는 안정감으로 비유되곤 한다. 남녀가 만나 사랑을 키우는 연애 전반기에는 절정을 향하고는 있으나 아직 거기에 도달하지는 못하였기에 설레임과 함께 목적지(?)에 대한 강렬한 열정이 타오르고, 법률적 혹은 사실적 사랑의 결합을 이루고 난 연애 후반기에는 강한 동류의식에서 오는 일체감과 사랑의 확인에 따른 안정감이 감정의 주류를 이루는 것이리라.

 

이런 호르몬의 분비 기간과 양을 측정하여 사랑의 유효기간이 있느니 그것이 주로 3년 안쪽이니 말들이 많지만, 정작 나는 남녀 간 사랑이야기에는 관심이 없고 다만 설레임이라는 감정상태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을 뿐이다. 설레임은 연애에서만 느껴지는 감정은 아니다. 도파민이 설레임과 열정을 일으키는 호르몬이라고 하듯이 설레임은 열정을 이끌어 내는 중요한 촉발제가 되고 실과 바늘 같이 끈끈한 관계로 연결되어 있다. 새로운 학교, 새로운 직장과 같은 새로운 환경, 새로 만난 선생님, 직장 상사, 동료 혹은 친구를 접할 때 우리는 긴장을 동반한 설레임을 느낀다. 그 설레임을 만끽하는 때는 아마도 유아기에서 시작하여 청소년기를 거쳐 20대를 정점으로 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적어도 내 경험으로는... 30대를 넘으며 내 몸의 도파민 분비가 현격히 줄어들었는지는 확인하지 못했지만, 우리는 설레임이라는 감정을 매우 낯설어하는 중년들을 종종 보게 된다.

 

설레임은 새로움에서 오는 호기심이고, 그 예측할 수 없는 미래에 대한 감정이 불안감을 극복하고 들뜬 기대와 약간의 조바심으로 전환되는 상태라고 보여진다. 따라서 중년에게는 설레임을 느낄만한 상황을 겪을 일도, 행여 그런 상황과 마주치더라도 설레임을 가질 이유도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들의 오랜 경험이 이미 새로움의 미래를 예단하고 나름의 결론에 도달해 버렸으니 무엇이 설레이겠는가? 그것이 틀렸든 맞았든 말이다.

 

사회생활하면서 가장 모욕적이었던 기억은 나의 경력을 두고 '닳고 닳았다'는 표현을 들었던 일이다. 나쁜 의도는 아니었으나, 그 말이 얼마나 나쁜 말인지 모르는 상대방을 한심해하기에 앞서 치오르는 불쾌감을 감추기 어려웠다. 아무튼 이 '닳고 닳음'의 대명사인 대한민국의 중년들은 어떤 상황에도 설레이지 않는 강인하고 경직된 심장으로 무장하고 있다. 자의 반 타의 반. 당황하지 않는 것이 능력자의 요건이 되고 그런 사회적 요구가 자연스럽게 그들에게 설레임을 거부하게 만든 것이 아닐까?

 

설레임이 없는 삶이 완전무결한 삶이라는 터무니없는 명제에 갇혀 우리는 설레임이라는 인생에 중요한 행복 중 하나를 포기하고 사는 것은 아닌지. 삶에 무기력해지고 반복되는 일상과 의미를 찾기 어려운 업무에 괴로워하는 이유가 부족한 설레임 때문이라는 확신이 들기 시작한다. 설레임 없이도 과도한 업무 의욕과 열정을 불태우는 목적의식 내지는 성취욕으로 가득 찬 능력자(?)가 아닌 나는, 내 안에 남아 있을지도 모르는 열정을 끌어내는 방법을 모르며 그저 설레임이 찾아올 때 온몸의 핏줄들이 살아서 꿈틀거림을 느낀다. 이것도 지독한 유아기로의 퇴행일까?

 

안타까운 것은 내게도 남은 설레임이 별로 없다는 사실이다. 일상에서의 설레임을 자발적으로 거세한 능력자들은 주로 일탈이 주는 짜릿함으로 부족한 도파민을 채우는지도 모를 일이다. 도파민은 중독성이 있고 외부에서 제조하여 주입하여도 동일한 효과가 있다고 하니(마약이란 얘기), 그렇게 비타민제를 장복하듯이 부족한 설레임을 대체하고 있는 게 아닐까?

 

상표권의 소진 이론에 따르면, 진정상품으로 제조되어 한차례 정당한 거래(양도)가 이루어지면 상표권은 소진되고 이후의 거래행위에 어떠한 권리행사도 할 수 없다고 한다. 설레임도 이와 같이 진정성 있는 감정으로 제조되어 한차례 진지하고 짜릿한 무엇(사랑, 창작행위 등)으로 승화(?)된 이후에는 소진되어 버린 것은 아닐지. 하나의 제품이 한차례의 거래에서만 상표권을 행사할 수 있듯이, 한 인간에게도 한차례의 진정한 설레임과 열정이 허락된 것이 아닌지 궁금해진다. 아마도 뛰어난 예술가들에게는 예외일 것 같지만.

 

너무도 당연한 얘기지만, 사랑이란 비정상적인 상태에서 설레임이 일듯이 지극히 일상적인 업무와 사회적 성공이 설레임을 유발할 수 없다. 사실은 누구에게나 아직 설레임을 끌어낼 대상이 있다. 당신의 설레임은 사랑에 있어서만 소진된 것이다. 당신의 설레임을 되찾아줄 대상은 당신만이 알고 있다. 당신이 그것을 찾으려는 의지만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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