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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짓’과 ‘따위’

사람과 물건을 혼동하지 말자(2012. 12. 31)

by 낙산우공

별것 아닌, 하찮은 것을 가리키는 관형사로 '까짓'이란 말이 있다. 앞에 나온 대상을 낮잡거나 부정적으로 이르는 말로 '따위'가 있다. 두 단어 모두 사람을 지칭하여 쓰는 표현은 아니다. 그러나 요즘 흔하게 쓰인다. '너 따위가', '네까짓게'... 이런 표현에는 때로 '감히'라는 말이 덧붙여지곤 한다.


1910년 조선이 멸망하고 35년간 일본 제국주의 식민시대를 거쳐 해방이 되고 3년의 미군정 통치를 벗어나 우여곡절 끝에 수립된 대한민국 정부는 자유민주주의 공화국이다. 신분과 서열이 엄격하여 출신성분에 따라 처우와 대접이 달라지는 봉건사회가 아니다. 왕조국가도 아니다. 그런데 21세기 대한민국은 불분명하지만 신분사회의 잔재도 아닌 묘한 계급이 존재하는 것 같다.


사극 드라마에 단골로 등장하는 안방마님의 대사, '네 이놈, 감히 네가 어느 안전이라고 그런 망발을 입에 담는 게냐?', '정녕코 네가 물고를 당해야 정신을 차릴 것이냐?', '주제도 모르고 어디서 양갓댁 아기씨를 넘본단 말이냐'?', '무엄하기 짝이 없구나. 근본 없는 핏줄인 줄은 알았지만', '금수의 눈빛을 하고 누굴 노려 본단 말이냐?'... 이때 주로 마당 한가운데서 무릎을 꿇고 있는 이는 머리를 망나니처럼 산발을 하고 저고리 고름은 반쯤 풀어져 추레한 옷차림이지만 눈빛만은 부리부리한 마당쇠(?)다.


이런 장면은 대부분 오만방자한 안방마님이 악역이고 순수하고 착하지만 바른 심성과 또렷한 주관을 가진 젊고 혈기 왕성한 마당쇠가 주인공이다. 그리고 모든 시청자는 마당쇠에 빙의되어 거만한 안방마님을 향해 분기탱천한다.


'따위', '까짓'이란 단어의 최근 용례를 보면 구태의연한 사극 드라마의 재현이라 할 만하다. 그리고 이런 저급한 표현의 등장은 방송 드라마의 책임이 8할은 될 법하다. 다만 모든 트렌디 드라마는 대중의 트렌드에 철저하게 반응하기에 그 8할의 원인제공자는 결국 현실의 우리일 것이다. '달걀이 먼저냐 닭이 먼저냐' 하는 논쟁과 같이 대한민국은 천박하기 그지없는 표현을 길거리에서 그리고 브라운관(아니, LED 디스플레이 평판)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보고 듣는다.


세상의 어떤 지위와 권력도 천부인권을 부정할 수 없다.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모든 인권에 대한 존중이 인격의 바탕이니, 하나하나의 인격이 제 자리를 잡기 전에는 까짓 국격 따위를 운운할 자격이 없다.


* 이 표현들이 입 밖으로 나오는 경우가 흔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안타까워하는 것은 많은 이의 의식 속에 이미 깊숙이 자리 잡아 버렸기 때문이다. 우리는 부지불식간에 누군가를 까짓것 혹은 ~ 따위로 인식하고 있고 그 의식의 기저는 사회 저변에 깔린 천박하고 속물적인 기준에 따른다는 것이다.


** 차라리 도련님과 아씨를 모시던 '방자'와 '향단'이 시절이 더 인간적이라고 느껴지는 것이 고전소설과 드라마의 핑크빛 포장 때문이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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