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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낙산우공 Oct 07. 2021

희망의 서사

자식이 뭔지(2019. 12. 29)

간절함은 때로 죽음을 비켜 갈 만큼 놀라운 힘을 발휘한다. 자연의 법칙과 세상의 이치에 따라 순리대로 흘러가는 것이 자연스럽겠지만, 그런 순리가 무엇인지 혹은 어느 방향인지 갈피를 못 잡는 순간이 있다.​


그런 순간은 대개 절박함에서 온다. 기다리고 있는 결과가 혹여 기대와 다르게 나오더라도 또 다른 길로 조금 우회하거나 혹은 더 나은 진로를 위한 실패쯤으로 여길 만큼의 여유가 없는 순간, 도대체 대체나 치환이 불가능하다고 밖에 느낄 수 없는 순간, 그때의 절박함을 우리는 피가 마른다고 표현한다.​


마흔을 훌쩍 넘겨 쉰을 바라보는 내게 큰 낙담도 원대한 소망도 적당히 사라져 버려 웬만한 일에는 놀라거나 긴장하지 않지만, 오직 단 하나 예외가 있다면 그건 자식에 관한 일이다.

그들의 삶은 대신 살아 줄 수 없기에 결국 스스로 이겨내고 짊어져야 하는 일이기에 그 순간순간 애가 타는 마음으로 도와주고 조언해주더라도 아이들의 몫이다. 때로 심지가 굳어 씩씩하게 잘 이겨내는 것이 대견하기도 하고 슬럼프에 빠져 힘겨워하는 모습에 안타깝기도 하지만 그저 부모는 지켜볼 뿐이다.​


그런데 아주 간혹 터무니없는 어른들의 문제로 아이가 곤경에 빠지는 경우가 있다. 매우 부당하고 저열한 어른들의 논리에 아이들이 희생되어야 하는 경우가 있다. 이때 부모는 피가 거꾸로 솟는다. 세상일이 제맘같이 되는 경우는 없기 마련이라 치부하기엔 도저히 그냥 넘어갈 수 없는 때, 나는 모든 걸 걸고 분연히 맞섰다.​


그 부당함의 결과가 비단 내 아이에게만 피해를 주는 것이 아니지만, 난 여기에 굴복하고 시류에 편승하는 모습을 보여줄 수 없었다. 그것을 외면하고 편하게 잠이 오지 않을 바엔 작정을 하고 붙어야 하는 것이다. 비록 산산이 부서져 내 아이까지 피해를 보는 최악의 상황이 돌아오더라도 말이다.​


참을 수 없는 부당함에는 참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몸소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 장장 한 달간의 싸움이 이제 1차 결과로 나타나기까지 이틀밖에 남지 않은 오늘 밤, 나는 분연히 맞섰으나 결국 새가슴이 되어 그날의 운세를 확인하기 위해 자정을 기다린다.

그 터무니없는 운세에라도 위안을 받고 싶을 만큼 떨리고 불안하다. 이 일로 머리가 터질 것 같다고 하소연하자 누군가 말했다.​


"자식 일인데 머리 터지는 게 대수냐?"




재작년 나의 연말을 저당 잡혀버린 사건은 우여곡절 끝에 최악의 상황은 피해 가는 것으로 학교와 합의가 되었다. 그렇게 큰아이의 학교는 정상화되었고 이제 입시가 이틀 앞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나는 또 똑같은 심정으로 아이를 응원하고 있다. 마치 데자뷔와도 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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