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낙산우공 Sep 22. 2021

공동체적 인간과 독립적 인간의 갈등

갈등할 권리조차 박탈당한 자?(2020.12. 6)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대표작 ‘개미’와, 개미 전문가로 일반인에게 알려진 동물행동학자 최재천 교수의 강연을 통해 알게 된 얕은 지식에 따르면 개미는 독립적 개체로서 존재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군집생활을 하는 개미 공동체의 구성요소로서 개체를 구성하는 세포처럼 행동하기도 한다. 그래서 공동체와 분리된 한 마리의 개미를 과연 독립적 개체로 볼 수 있는지 의구심이 들게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즉, 개미는 독립적 개체의 생존보다는 공동체의 생존을 위해 행동하기 때문에 일개미, 병정개미 등의 자기희생적 행동은 여왕개미를 중심으로 하는 개미 공동체를 하나의 개체로 인식할 때 훨씬 이해하기 쉽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이론은 비단 개미 사회에 만 국한되지 않는 것 같다. 불과 20여 년 전만 하더라도 우리 사회에서는 개인과 조직을 분리하지 않고 조직의 발전, 혹은 나라의 발전이 곧 개인의 발전이라는 등식이 꽤나 설득력 있게 먹혀들었기 때문이다. 내가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에 막 진입하던 시기에 채용면접의 단골 질문 중 하나가 가족과 일이 양립할 수 있는가, 혹은 무엇이 더 우선인가라는 터무니없는 것이었다. 당시에 우리는 이 뻔한 답을 요구하는 질문에 항상 영혼 없는 답변을 강요당했다. 적어도 나는 그와 같은 질문에 공식 같은 정답을 말하지는 않았다. 그러기에는 나의 자아라는 놈이 너무도 정직하였고 실리적 자기부정을 혐오하였기 때문에 말이다.

이제는 이런 형편없는 질문에 고문당하지 않아도 되는 사회가 되었지만, 여전히 인간은 공동체 구성원으로서의 역할과 독립적 개체로서의 욕구 사이에서 갈등하고 번뇌한다. 우리의 삶은 늘 생존환경에 영향을 받을 뿐 아니라 그 생존환경이라는 것이 항상 공동체를 배제하고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무인도에서 야생의 삶을 사는 로빈슨 크루소도 병만족도 아니기에, 항상 공동체 안에서 흔히 말하는 제도권 안에서의 삶을 끊임없이 강요받고 또 갈구한다. 그 안정감이 내 삶에 많은 풍요로움을 제공한다는 사실을 쉽게 부정할 수 없다.

다만, 직장으로 대표되는 현대인의 공동체는 이제 그 가치가 많이 하락하여 생계의 수단을 넘어서는 지고지순한 목적이 되지는 못한다. 여전히 그와 같은 형식적 직함에 목을 매는 무지몽매한 백성이 있기는 하지만, 한 사회를 장악하는 지배적 가치로서의 위상은 박탈당한 지 오래다. 사실 내가 오늘 하고 싶은 이야기는 직장으로서의 공동체가 아니라 가족 공동체다. 그것도 1촌 이내 혈연으로 연결된 직계가족 말이다. 즉 나와 아내와 자녀들로 구성된 핵가족 공동체는 한 개체로서의 인간이 삶을 영위하는 데 있어서 필연적인 관계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와 같은 관계를 애당초 거부한 사람들을 빼고서 말이다.


이 공동체는 철저하게 나의 주도로 구성되었다. 나의 부모와 형제는 내 의도와 무관하지만 내 배우자와 자녀는 철저하게 나의 선택에 따른 결과물이다. 우린 부모님의 중매로 일면식도 없는 처자와 초야를 보낸 조선의 사대부집 도령이 아니지 않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자발적 선택의 결과는 나의 핑크빛 망상과는 무관한 방향으로 흐른다. 내가 제아무리 통찰력을 갖춘 성인군자라 하여도 내 배우자와의 삶, 그리고 그 배우자와의 사이에서 생겨난 자녀와의 삶을 예측하고 전망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물론 내가 의도한 방향으로 어느 정도 전개될 수는 있지만 내 배우자는 연애시절의 그녀일 수 없으며, 하물며 자녀에 이르러서야 말해 무엇하랴. 그들과의 충돌과 갈등은 결국 필연이다. 그저 그들이 감당하기 어려운 고약한 성품이나 예상하지 못했던 비범한 공격성을 드러내지 않는 것을 감사하고 살 일이다.

이야기가 점점 하소연이나 푸념으로 흐르는 경향이 있으나, 오늘의 주제를 마무리해 보면, 나의 선택으로 이루어진 가족공동체에서 나의 역할은 나의 독립적 자아가 추구하는 욕망과는 끊임없이 배치된다는 것이다. 일과 개인을 양립하기 어렵듯 가족에서의 아빠라는 역할은 자유분방한 개인의 욕망과는 참으로 부정교합이라는 얘기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끊임없이 강요되는 책임감으로 똘똘 뭉친 아빠라는 타이틀에 지쳐가던 어젯밤, 불면의 밤을 위로받기 위해 보았던 영화는,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에게 아카데미를 안겨준 “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였다. 이 영화를 보신 분은 알겠지만 어젯밤의 나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영화였다.


단선적인 줄거리에 2시간 36분의 러닝타임, 그리고 새벽임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내게 졸음을 선사하지 못했다. 감독의 뛰어난 연출력이겠지만, 광활한 설경에서 생존의 사투를 벌이는 주인공이 극한의 환경에서 살아남은 이유는 아들이었다. 아빠를 구하려다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아들의 복수를 위해 주인공은 회색 곰에게 공격당해 만신창이가 된 몸을 이끌고 처절하게 살아남아 복수를 완성한다. 흡사 송강호의 ‘복수는 나의 것’을 보는 듯 소름이 끼치는 영화였다. 심지어 주인공을 공격한 회색 곰은 새끼 곰들을 지키기 위해 결국 자기 몸을 희생하였다. 영화의 주제가 단순히 부성애는 아니었지만, 아들을 지켜주지 못한 아빠의 분노는 그를 죽음에서 돌아오게 하였다. 죽음에서 돌아온 자가 아들의 복수를 완결하는 순간, 그의 눈앞에는 먼저 간 아내의 환영이 비친다.


오늘도 나는 공동체를 지키는 일개미요, 병정개미다. 우리 집 여왕개미는 과연 누구일까? 단언컨대 나는 아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자존감 상실의 시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