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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낙산우공 Sep 13. 2021

자존감 상실의 시대

수학은 어려워(2015. 6. 23)

자신을 존중하고 사랑하는 마음을 자존감이라 한다. 아이를 키우며 고민하게 되는 가장 큰 주제가 바로 자존감을 심어주는 것이다. 자존감은 자아를 정확하게 인식하는 데에서 시작한다. 아기들이 처음 말을 배울 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 '나'라는 표현을 못한다는 것이다. 즉, 내가 이러저러했다는 설명을 하고 싶을 때 아이들은 자신의 이름을 빌어 'OO이가' 이랬어요, 저랬어요 한다. 그래서 트렌디한 드라마에 등장하는 여자 주인공이 남자 친구 앞에서 애교를 부릴 때 이런 행태를 보이는 것이다. 사실 애교라기보다는 응석에 가깝지만 말이다.

 

아이들은 자아를 식별하지 못하고 타자와 자아를 구분하지 못하기 때문에 모두를 객체화시키는 것이다. 자아를 구분하게 되면 내 것과 네 것을 구분하고 결국 소유의 개념을 이해하게 되고 급기야 욕심과 탐욕을 잉태하기도 하지만, 주체와 객체를 구분하는 것은 중요한 성장단계라고 아니할 수 없다. 그 자아를 얼마나 소중하게 생각하느냐가 아이의 인생을 크게 좌우하기 때문이다. 물론 자존감과 이기심은 엄밀히 구분해야 하지만 말이다.

 

자아를 인식하고 그것을 존중하고, 자아의 욕망을 들여다보는 아이는 주체적으로 성장하고 주도적으로 삶을 영위한다. 우리의 육아는 여기에서 출발해야 한다. 이 아이가 얼마나 유능한 아이가 되느냐가 아니라 이 아이가 얼마나 자존감을 갖느냐가 먼저라는 말이다. 초등학교 4학년부터 수포자가 나오는 교육도 문제이지만, 그것을 안타까워하기에 앞서 자신의 삶을 주도적으로 살지 못하는 아이의 수동적 반응을 걱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자기 주도 학습은 자존감에서 나온다.

 

기말시험을 앞둔 초등 3학년 아들을 붙잡아 놓고 예상문제지를 풀리고 있던 아내가 어제 버럭 소리를 질렀다. 도대체 몇 번을 설명해 준 개념을 왜 매번 되묻고 있냐는 것이었다. 미터와 킬로미터, 초와 분과 시간의 단위를 이해하고 단위를 환산하여 사칙연산을 수행하는 응용문제였다. 아이가 기계적인 대답을 하거나, 머릿속에서 연산처리를 하지 않은 채 대충 질러대는 답들에 아내가 폭발한 것이다. 문제의 핵심은 무엇이었을까? 단위의 개념과 환산의 방법을 이해하지 못한 것일까?

 

아니다. 이 아이는 기말고사 준비를 해야 하는 자신의 처지를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왜 기말고사를 보는지, 그 시험은 왜 잘 보아야 하는지, 그 시험을 잘 보기 위해서 왜 문제지를 미리 풀어보아야 하는지, 수학은 왜 공부해야 하는지... 등등... 대부분의 아이들은 이런 근본적인 질문을 배제한 채 엄마가 주도하는 학습에 끌려가기 바쁘다. 그저 이것을 잘하면 칭찬을 받고, 조금 우쭐해진다는 것뿐이다. 더 재밌는 것은 대부분의 엄마도 근본적인 질문을 외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지극히 근시안적으로 기말고사의 점수와 등수가 그들의 목적이 되고 마는 것이다. 그것 또한 아이의 자아를 무시한 채 엄마들의 성취감에 일조하고 있을 뿐인데.

 

350초를 분과 초로 환산하는 문제를 놓고 딴짓을 하던 아이에게 내가 물었다.

1분은 몇 초야?

60초

2분은 몇 초야?

120초

3분은 몇 초야?

180초

그럼 300초는 몇 분이야?

180초.

 

나는 여기서 인내심의 한계를 느꼈다. 350초를 분으로 환산하려면 60초로 나누어 몫은 분으로 나머지는 초로 계산하면 된다는 설명을 하기 위해 시작한 나의 문답에 아이는 마지막 질문에서  전의 답을 기계적으로 뱉은 것이다. 너무도 화가  나는 이렇게 말했다. "300초는  분이야라고 물었는데 180초라고 대답하는 , 이번  토요일이 며칠이야라고 묻는데 목요일이야 라고 대답하는 것과 같다." 아이는  말의 뜻을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다만 아빠가 몹시 화가 났다는 것만 동물적으로 인지하고 있었다. 나는 다시 물었다.

 

"1분이 60초니까 60초가 몇 개 있어야 300초가 되느냐는 말이었잖아? 그래서 350초는 몇 분 몇 초가 되는가를 물어보는 거고.."(격앙된 채)

아이의 대답은 1초의 망설임도 없었다. "5분 50초"

 

다시 한번 얘기하지만 문제는 자존감이다. 자존감이 동기를 가져오고, 동기가 의지를 생산하며, 의지가 집념을 끌어내고, 집념이 학업성취를 이룩한다. 문제는 수학이 아니다.

 

* 아이에게 자기 주도적 공부습관을 심어줄 요량으로 다소 흥분하여 10개의 문제를 내주고는, 누구에게도 묻지 않고 너 스스로 생각해서 풀어라. 그리고 그 문제들을 다 맞히면 스케이트보드(엄마가 절대 안 된다던)를 사주겠다고 약속을 했다. 시간제한은 없으며, 잘 모르겠거든 문제를 읽고 또 읽어라. 문제 안에 답이 있다. 이렇게 자상하게 설명까지 덧붙였다. 아이가 충분히 이해하고 있던 문제들이라고 생각했기에 단지 동기부여를 해 주고 자기 주도 하에 문제를 해결하는 경험을 선사해 줄 생각이었다.

아이는 눈이 반짝반짝해지면서 드디어 스스로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고,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꽤 진지하게 문제를 풀어 갔다. 나 역시 자못 기대감을 숨기지 못한 채 아이를 지켜보고 있었다. 안타깝게도 결과는 10문제 중 6개를 틀렸다.

 

문제는 기초실력이기도 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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