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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낙산우공 Sep 01. 2021

딸바보

딸아이를 대하는 아빠의 자세(2016. 4. 15)

딸아이를  아빠 치고  제목에서 자유로운 이들은 드물다. 딸이 이쁘건 똑똑하건 착하건 상냥하건 혹은 전혀(?) 그렇지 않건 간에 딸을  아빠는 바보가 된다. 살뜰히 자식들을 돌보고 아끼고 사랑을 듬뿍 주는 것에 허물을 들먹이며 면박을  수는 없다. 아내 자랑은 팔불출 소리를 들어도  자랑은 어지간해서는 용서해 준다.  가진 부모의 마음이 대개 그러한 것을 이해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대한민국 사회는 수컷을 제일로 치던 남아선호가 한풀 꺾여 아이를 낳아도 딸이기를 바라는 이들이 늘고 있다. 특히 진한 사춘기를 겪어  아빠들은 아들의 방황을 제어할 힘도 방법도 없다는 것을 알기에 피해 가는 선택(물론 선택의 영역은 아니다) 했는지도 모른다.


유난스러운 딸 사랑으로 치면 나도 밀리지 않는 축이라 생각하지만, 물고 빠는 시절이 지난지는 오래고 그저 눈길과 말 한마디만 걸어주어도 감사한 중학생 아이가 되었다. 조석으로 수발을 들어주고 취향을 헤아려 제때제때 볼품없는 재력이나마 행사해주어 그럭저럭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그런데 가끔 사춘기 예민한 감성을 감안하더라도 버릇없이 치고 들어올 때면 나도 사람인지라 화가 난다. 도를 넘었다고 생각되었을 때는 호되게 야단을 친다. 아니 솔직히는 화를 낸다. 늘 만만하고 져주는 아빠도 이렇게 엄청 맘 상할 때가 있다는 것을 보이는 것이다. 그럴 때면 본성이 착한 아이라서 그런 건지 한마디 말대꾸도 없이 조용히 혼이 나고는, 얼마 후 토라진 아빠에게 와서 퉁명스럽지만 진정성 있는 한마디를 던지고 간다. "잘못했어"


이 순간에 모든 악감정이 눈 녹듯이 사라지는 것은 딸바보 아빠들의 공통점 이리라. 중요한 것은 그렇게 풀린 기분을 아이에게 들켜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견디기 힘들겠지만 최대한 감정을 억누르고 불편한 기분인 척 연기를 해주어야 한다. 정말로 견디기 힘든 일이지만 말이다. 그렇게 반의 반나절 정도를 보내고 아이를 불러 조용히 타이르는 것이다. 물론 이때쯤 아이의 반응도 예전으로 돌아가 있기는 하다. 도끼눈을 하고 기분이 풀린 아빠를 흘겨보곤 한다. 아이로서도 늘 만만하고 제 밥이라고 생각한 아빠에게 잠시 무릎을 꿇었을 망정 그 권력관계를 계속 유지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아빠를 진지하게 대하는 게 어색하기도 할 테고.


어릴 적엔 물고 빨고 장난치고 울리고 혼나고 맞고(물론 내가 맞는다)... 이것이 나와 딸아이 사이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이었는데 요즘은 주로 모시고 받들고 챙겨드리다가 슬쩍 농담 걸고   맞는 것이 일상이 되어 간다. 이렇게라도 아이의 관심에서 벗어나지 않으려는 나의 발버둥이 참으로 지질하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태양의 후예" 보는 아이에게 말을 걸어  일이 있는가? 우이독경의 세계를 경험할  있다. 그렇게 아이는  품을 벗어나 세상(?) 만나고 있는 것이다.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관심을 갖게 되면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하게 된다. 그의 무심한 행동 속에 반복되는 버릇, 손가락, 발가락, 혹은 종아리, 허벅지 어딘가에 있는 사마귀나 점과 같이 아무것도 아닌 것이지만 내게는 특별하게 느껴지는 것들이 있기 마련이다. 요즘은 딸아이의 얼굴이나 몸 어느 곳도 원 없이 뚫어지게 바라본 적이 없다. 무심코 쳐다본 것에도 아이는 과잉반응을 하니 말이다. "뭘 봐?" 혹은 "왜 그래?" 그 시비조의 반응이 두려워 나는 우리 아이를 훔쳐본다. 그리고 새로운 것을 발견했을 때는 조용히 집사람에게 귓속말을 한다. 그럼 바로 들어오는 아이의 반응.."둘이 뭔 얘기해?"


싸늘한 눈길만 마주쳐도 심장이 덜컹하는 불안은 군대를 제대한 후 오랜만에 느껴보는 감정이다. 이렇게 아이는 떠나가고 있다. 그것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그 아이가 제 힘으로 세상을 살아내고 사람을 만나고 누군가를 사랑하고 가정을 이루고 아빠가 느꼈던 행복을 누리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조용히 한편에서 지켜봐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그런데 마음 한구석이 허전하고 서글픈 이유는 단 하나.


"아, 이렇게 늙는 거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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