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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낙산우공 Aug 20. 2021

엄마가 보고플 때

의리로 뭉친 부부(2012. 10. 26)

"엄마가 보고플 때 엄마 사진 꺼내놓고 엄마 얼굴 보고 나니 눈물이 납니다." 90년대 대한민국에서 군대생활을 경험한 이라면 첫 소절만 들어도 뽀빠이 이상용과 우정의 무대가 떠오를 것이다. 이토록 엄마는 대한민국 육, 해, 공군, 해병대, 의경을 아울러 서러울 때 울컥 그리워지는 대표 아이콘이다. 오죽하면 엄마 한분만 나오시면 수십 명이 제 어머니라며 달려 나왔을까 말이다. 정말 목소리를 못 알아봐서 그리하였겠는가? 재밌는 건 이 프로그램을 보며 눈물을 훔치는 이는 제대한 아들이 아니라 아들의 무심함이 서러워 그때가 그리운 어머니들이라는 사실이다.

 

신파의 스토리는 단순하지만 정공법으로 사람을 울린다. 그 익숙하고 뻔한 이야기가 익숙한 만큼 뻔하게 감정에 이입되는 탓이리라. 모든 대중과 통속의 Steady Seller는 이러한 익숙함과 뻔한 대중의 감성을 자극하는 것 같다.

 

'엄마'라는 단어가 모든 자녀들에게 주는 감상은 '편안함', '안락함', '투정을 받아줄 유일한 존재' 등이다. 제아무리 강인하고 냉철한 사람도 가끔 나약해질 때가 있고 그때마다 누군가에게 기대고 의지하고 싶어 진다. 아니 위로받고 싶어 진다. 그 틈새를 파고드는 엄마는 때로 절대적이고 대체 불가능하다고 여겨지기도 하였다.

 

나이가 들면서 사회적으로 독립체인 성인이 되면서 이제 엄마에게는 거꾸로 내가 그러한 존재가 되어 버렸다. 나는 엄마에게 절대적으로 의지하고 싶은 존재로 인식되고 있다. 세월은 이렇게 역할 바꾸기의 상황극을 만들어 버리지만, 안타까운 것은 그 상황이 극이 아니라 현실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이제 엄마의 대체 인물을 찾아야 한다. 없으면 견디기 어렵다. 영웅호걸도 베갯머리송사로 대사를 그르치듯이 이 대체 인물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영웅호색이란 말로 권력자의 치정관계를 옹호하기도 하지만, 사실 영웅이라 색을 밝힌 것이 아니라 누구 하나 믿을 수 없는 외로운 권력자가 엄마를 대신할 누군가를 찾은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내 이야기의 요지는 그 부정한 관계를 정당화하려는 게 아니라 그 관계의 실체를 들여다보자는 것이다.

 

왜 폭군 연산이 장녹수에게 꼼짝을 못 하고, 당나라 현종이 양귀비 치마폭에서 놀아났는지를 생각해 보라. 대저 영웅이라는 자는 그들에게 쏠리는 세간의 이목에 의해 스스로를 영웅시하지만 무서울 땐 엄마 치마폭이 그리운 평범한 인간일 뿐이다. 영웅을 넘어 성웅으로 추앙받는 이순신 장군 정도라면 모르지만 말이다. 이순신 장군이 호색한이었다는 기록은 없다.

 

유치원에 다니는 둘째가 어려운 교구 활동을 강요하는 선생님 때문에 눈물이 났다고 한다. 교구를 하는데 엄마가  보고 싶고 보고 싶은데 엄마가 없어서 눈물이 났단다. 우리는 궁지에 몰리면 엄마가 그립다. 인간은 이토록 나약하다. 마흔이 넘어도 유치원 아들과 다를  없다. 세상 어렵고 힘들면 가족이 그립다. 집에 가고 싶다. 집에 들어가 집사람 무릎을 베고 누우면 한결 마음이 안정된다.

 

대한민국의 아줌마들이여... 당신의 남편에게 무릎을 내어주어라. 남편의 귀가시간이 부쩍 빨라질 것이다. 어느 날 열 살 먹은 딸아이 무릎을 베어보았다. 이것도 편하다. 우리 딸은 기름기 많은 아빠의 머리가 더러워 수건을 깔지만 그래도 아직은 무릎을 내어준다. 그래서 나는 하루하루를 버틴다.




 글을   대략 9 가까이 흐른 지금 내게 무릎을 내어주는 이는 없다.  주머니,  팔다리, 심지어  머리를 필요로 하는 이들은 많지만 그들도  무릎에는  관심이 없다.  무릎에 올라오거나 내게 무릎을 내어줄  같은 이는 이제 반려견 호두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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