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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낙산우공 Aug 12. 2021

호칭으로 본 권력구조

호부호형을 허하라(2018. 2. 7)

우리는 동성 형제를 형제 또는 자매라고 부르며, 이성 형제는 남매라고 부른다. 남자 형제의 경우, 어릴 적에는 물리적 힘이 지배하기 때문에 충돌도 잦지만 대체로 형과 아우의 서열이 꽤 명확하게 정리된다. 여자 자매의 경우, 남자아이들과 달리 서로에 대한 관심과 우애가 각별하다고들 한다. 문제는 항상 이성 남매 사이에서 발생한다.


일반화할 수 없지만, 오누이의 경우 유난히 여동생을 아끼는 각별한 오빠가 있기도 하지만, 대개 동생에게 무관심한 편이다. 간혹 강압적이거나 폭력적인 오빠도 있는데, 자신의 생활태도는 무시한 채 여동생의 행실을 간섭하는 경우 말이다. 이 경우는 크면서 서로 데면데면해지기 일쑤이기 때문에 별문제가 되지 않는다. 보통은 누나와 남동생 간의 관계가 늘 말썽의 대상이 된다.


남동생을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이 남다른 우리 딸은 누나를 제법 잘 따르는 동생과 어려서부터 잘 지내는 편이었다. 그런데 조금씩 커가면서 남동생의 도발(?)에 잘 흥분하고 감정 조절을 못하기 시작했다. 누나를 누나로 대접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둘 사이를 지켜본 내 결론은, 동생의 깐죽거림과 누나의 예민함이 상승작용을 일으킨 탓이다. 지금도 가끔은 서로 죽이 맞아 잘 어울리는 편이지만, 대체로 사소한 말다툼과 신경전이 일상다반사가 되었다.


아이들 간의 다툼에 별로 개입할 마음이 없었던 나는 주로 지켜보는 편이지만, 분위기가 과열 양상을 보이면 때때로 개입을 한다. 대체로 시비를 따져주지는 않지만 상대적으로 심해 보이는 쪽을 누그러뜨리는 방향으로 간섭을 하곤 했다. 물론 모든 싸움에는 늘 억울하고 밑지는 편이 생기기 마련이다. 이럴 땐 일방을 강하게 두둔하지 않으면서 둘 사이의 감정을 조율하는 것이 관건이다. 다만, 최근 들어 이 일도 쉽지 않다는 것을 자주 느끼곤 한다.


딸아이는 무용을 전공하기 위해 예고 입시 준비를 하고 있다. 학업과 무용을 병행해야 하는 탓에 육체적, 정신적 스트레스가 부쩍 늘었다. 참을성과 배려심이 많은 아이지만, 스스로 감당해야 하는 현실이 버겁기 때문에 동생과의 충돌도 잦아졌다. 그런 형편을 알기에 나도 은근히 큰애를 두둔하는 버릇이 생겼다. 그에 대한 둘째의 서운함도 당연히 커졌을 것이다.


요즘 이런 불편한 관계로 힘겨워하던 딸아이는 가끔 무용학원 선생님께 하소연을 했었던 듯하다. 공교롭게도 두 명의 선생님 모두 남동생이 있어서 우리 아이와 비슷한 경험을 갖고 있었다. 이 두 선생님의 반응을 들으며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되어 옮겨본다.


현대무용을 가르치는 선생님은 우리 아이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남동생은 무시하면 안 된다.

남동생은 무시하는 게 아니라 철저하게 "개무시"해야 한다.

너는 무용을 전공하고 있지 않니? 너의 무기를 철저히 활용해.

선생님이 말씀하신 무용 전공자의 무기는 바로 "발차기"였다.

즉, 남동생에게는 값싼 동정심을 베풀게 아니라 초장부터 버르장머리를 고쳐 놓아야 한다는 것이다.

감히 누나에게 대들지 못하도록 말이다.


발레를 가르치는 선생님의 반응은 좀 달랐다.


동생이 너를 무어라 부르니?

"누나"라고 부른다고?

그럼 네 동생은 엄청 착한 아이야.

나는 남동생이 둘 있는데 한 번도 그런 말을 들어본 적 없어.

남동생들은 그 선생님을 항상 "야~"라고 부른다는 것이다.


첫 번째, 현대무용 선생님의 반응을 들었을 때는 그저 웃음이 났다. 그 선생님이 유난히 괄괄하고 털털한 성격이라, 그분에게 너무 어울리는 반응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두 번째, 발레 선생님의 반응을 들었을 때는 뭔가 크게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선생님은 현대무용 선생님과 달리 여성스러운 분이었다. 남동생이 자신에게 함부로 대하는 것을 제압하지 못했던 것이다.


문제는 대드는 동생을 제압하지 못하는 선생님에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철없이 누나에게 함부로 대하는 동생에게 있는 것도 아니다. 내 느낌에 그 선생님의 동생들은 결코 막되어먹은 아이들이 아니다. 그럼에도 누나를 친구 혹은 동생 대하듯 함부로 하는 것에 대하여 어떤 죄의식도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그것을 오히려 친근함의 다른 표현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이 문제는 우리 사회의 뿌리 깊은 남성우월주의와 폭력성이 빚은 부끄러운 사회현상이다. 남자 형제간에 형을 하대하는 동생은 응징을 당한다. 1차로는 육체적으로 우월한 형의 폭력에 노출되고, 2차로는 나이 많은 형을 대접하지 않았다는 부모님의 벼락이 떨어진다. 형을 대접하지 않는 동생은 패륜아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누나를 하대하는 남동생에게는 상대적으로 관대하다. 발레 선생님의 부모님들이 양식 없는 분이셨을 리 없다. 그런데 누나에게 하대하는 남동생들의 버릇을 고쳐놓진 못하셨다.


내가 아이들에게 무섭게 혼을 내는 경우는 대부분 두 가지 이유다. 윗사람에게 예의를 갖추지 않을 때와 상대를 배려하지 않을 때.


요즘 사회에서 형과 누나가 부모와 같은 지위를 누릴 순 없다. 부모의 지위도 흔들리는 판국에 말이다. 그러나 윗사람에게 예의를 갖추는 것은, 그 사람의 인품과 도량에 감복하여서가 아니라 그 사회적 위치가 갖는 권위를 존중하는 것이다. 제아무리 형편없는 인간이라도 그가 집안에서 혹은 학교나 직장에서 내 위에 있다면 마땅히 존중해야 한다. 그들의 부당하고 불합리한 행동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맞서야 하지만 말이다. 그에게 예를 갖추는 것은 아랫사람의 도리다.


우리 둘째가 착한 심성을 가진 아이지만, 자칫 버릇이 잘못 들었을 경우 누나를 무시할 수 있다. 나는 이럴 때마다 항상 단호하고 차갑게 응징했다. 누나가 잘못할 수 있고, 틀릴 수 있다. 그러나 누나라는 사실은 바뀌지 않는다. 내가 둘째를 혼낼 때마다 강조했던 말은, 설령 누나가 너보다 체격도 작고 힘도 약해졌다는 이유로 누나에게 힘을 과시한다면, 그날부로 너는 내 자식이 아니다. 너는 호로자식이기 때문에, 내 곁에 둘 수 없다고 말이다.


예전에 나의 둘째 형수가 우리나라 가족관계의 불평등한 호칭을 지적한 일이 있다. 여자는 시댁 식구 중 손아랫사람을 모두 존칭 한다는 것이다. 도련님, 서방님, 아가씨와 같이 말이다. 그런데 남자는 처가 식구의 손아랫사람을 모두 하대한다. 처남, 처제와 같이 말이다. 심지어 처형에게조차 '님'자를 붙이진 않는다. 호칭은 권력관계다. 그 호칭이 어떻게 명명되느냐에 따라 서열이 결정되고, 그 호칭을 대하는 태도가 나타난다.


내가 타인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이유는 그가 윗사람이거나 뛰어난 사람이기 때문이 아니다. 내가 존중받고 배려받기 위한 것이다. 내가 누군가를 존중하고 배려하면 상대도 당연히 나에게 그러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누군가 자기를 존중하고 배려하면, 자신이 우월하기 때문이라고 착각한다. 참으로 어리석고 부끄럽다 아니할 수없다.

상대가 비록 아랫사람이라도, 우리는 그를 존중하고 배려해야 한다. 그들도 나와 동등한 인격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아랫사람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사람에게 인품이 훌륭하다고 말한다. 그들은 그저 인격자로서 상대를 동등한 인격체로 대했을 뿐이다. 그렇지 않은 모든 인간은 비인격자일 뿐이다. 우리는 스스로의 비인격을 알아보지 못하고, 정상인을 우월하다 칭찬하는 매우 이상한 사회에 살고 있다.


요즘 신문, 방송에 시끄럽게 보도되는 우월적 지위를 남용한 온갖 성폭력 사건은 이 세상에 비인격자가 넘쳐난다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그들은 정상이 아니다. 비정상인 인간이 사회의 다수를 차지한다고 하여 그 비정상이 정상으로 취급되어서는 아니 된다. 우린 늘 양심과 상식에 비추어 살아야 한다. 그것이 준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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