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를 전달하는 법(2017. 6.21)
우리 둘째 아이는 어릴 적 말이 늦게 트여 어른들의 걱정을 산 일이 있다. 아이들마다 성장의 속도나 패턴이 다르기에 난 괘념치 않았으나 무엇이든 빠르고 높은 것을 선호하는 국민 성향 탓인지 주위의 시선은 늘 아이의 신체 및 행동 발달상황에 집중되는 것이 못내 불편하였다. 그런 걱정이 언제이었냐는 듯 우리 둘째는 이제 공포의 수다쟁이(?)가 되었다. 물론 어휘나 언어의 구사능력은 아직 떨어지고, 그래서 듣는 사람들로 하여금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하게 하는 아쉬움이 있지만 말이다.
둘째의 성장과정을 지켜보면서 특히 언어 발달에 있어서는 좀 색다른 경험을 하게 되었다. 아이들의 언어 발달은 주로 엄마, 아빠를 포함한 가족들의 입모양과 소리를 따라 하는 것에서 시작된다고 한다. 그래서 말 수가 많은 엄마, 아빠를 둔 아이가 언어 습득이 빠르고 지능발달에 이롭다는 이야기를 하곤 한다. 결국 아이들의 말투나 표현은 모사에서 시작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둘째는 언어를 하나, 둘 익혀가면서 자기만의 표현을 하는 것이 눈에 띄었다.
여러 가지 표현들이 있었지만 게으르고 무심한 부모를 만난 탓에 기억에 남는 건 몇 가지 되지 않는다. 다만 부정적인 표현을 할 때 유난히 남다른 단어를 구사했던 것이 인상적이었다. 예를 들어 어떤 것에 대한 선택이나 선호를 아이에게 물었을 때 대부분의 아이들은 '싫어' 또는 '좋아'라는 말을 한다. 그런데 우리 아이는 이렇게 표현하였다.
'그건 내 마음이 아니야'
'싫어'라는 표현은 단어가 갖는 부정적 의미만큼이나 어감도 좋지 않다. 그래서 아이가 단정적으로 혹은 공격적으로 이런 말을 뱉어내면 대부분의 부모들은 기분이 나빠지는 것이다. 기껏 아이를 생각해서 고민하다가 무언가를 제안했는데 일언지하에 거절을 당하면 불쾌해지는 건 인지상정이다. 그런데 우리 아이는 말이 좀 길어서 정확한 감정 전달은 어려울지라도 항상 이렇게 말했다.
'내 마음이 아니야'
서너 살 먹은 아이가 약간 우울한 표정으로 혹은 좀 토라진 얼굴로 이런 말을 하게 되면, 대부분의 부모는 무장해제가 된다. 특히 짧아서 서로 닿지도 않는 팔로 팔짱을 끼는 시늉까지 곁들이면 견뎌낼 재간이 없다. 한때는 이 아이가 내 머리 꼭대기에서 노는 게 아닐까 의심하기도 했다. 이 녀석이 고도의 전략적 사고를 통해 이런 표현을 구사할 리는 없다. 그저 본능적으로 아는 단어들을 이렇게 조합했을 것이다.
또 한 가지 기억에 남는 것은 누군가에게 화를 낼 때의 표현이었다. 짓궂은 아빠가 귀찮게 혹은 짜증 나게 장난을 걸어올 때 보통 심기가 좋지 않은 아이들은 '하지 마', '저리 가'라는 표현을 쓴다. 그 짧은 단어 조합은 강하고 밀도 있고 탁하게 상대에게 전달된다. 장난을 건 것은 아빠지만 슬그머니 부아가 치밀기도 한다. 이 녀석이 버릇없이 말하는데 따끔하게 혼을 내줘야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치사한(?) 보복심리가 발동하기도 한다. 그런데 우리 둘째는 이럴 때마다 이렇게 말했다.
"나 지금 화가 펄펄 나려고 해"
난 항상 '펄펄'이란 표현에서 모든 걸 내려놓게 되었다. 나에게 '펄펄'은 눈이 내릴 때 혹은 물이 끓을 때 쓰는 말이었다. 따라서 이 아이는 지금 아빠 때문에 몹시 화가 나서 눈이 세차게 내리듯, 물이 뜨겁게 달아 오른 듯한 상태라는 말이다. 이 창의적 표현에 나는 매번 무릎을 꿇고 말았다. 집사람은 이 아이가 아직 어휘가 모자라 이런 생뚱맞은 조합을 했다고 하지만, 사전적 의미를 찾아보면 상황에 딱 맞는 표현인 것이다. 사람들이 그동안 잘 쓰지 않았을 뿐 말이다.
오늘 아침 갑자기 우리 둘째의 언어 습득 과정이 떠오른 것은 다름이 아니라, 요즘 내가 감정 표현의 어려움을 겪고 있기 때문이다. 성인이 되고 사회경력이 쌓이면 우린 일상적인 표현에서조차 상대에 대한 배려보다는 효율성을 따지게 된다. 누군가와 대화할 때, 회의할 때, 협상할 때 어떤 표현이 가장 정확하게 내 의사를 효과적으로 전달할 것인가에 집중하게 된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우리의 사회생활은 공적인 업무의 영역에만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일하면서 만나게 되는 많은 사람들과 좀 더 1차원적인 교류를 하게 되는 것이다.
꽤 오랫동안 밥을 먹고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던 사람들이지만, 결국은 일로 엮인 그들에게 자칫 상처가 되는 말을 건네야 할 상황이 자꾸 생긴다. 내가 그만큼 불편한 말을 던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 상대의 지속적인 부당한 행위에 기인했음은 명백하지만 그에게 비수를 꽂는 한마디를 던지는 일이란 역시 불편하다. 나의 불편한 마음을 모르는지 상대의 부당함과 뻔뻔함은 도를 넘어간다. 결국 화가 머리끝까지 오른 나는 철저하게 그리고 싸늘하게 상대를 대할 것이다. 내가 좀처럼 이런 행동을 하지 않기 때문에 이번에는 이래도 될 거라고 스스로 합리화하지만, 결국 이 일로 두고두고 마음을 앓는 이는 바로 나다.
부당함에 대해 분노를 표출해야 하는 이유는 내 자녀들이 살아가야 할 세상이 좀 더 상식적이고 정상적이길 바라는 마음에서다. 이제 웬만한 억울함은 무시할 만큼 무뎌진 18년 차 직장인으로서 조금 더 편한 길로 갈 수 있다는 것을 알지만, 나는 직접 나를 향하고 있지 않은 부당함에도 분노하고 있다. 아직은 내가 사람이라고 자위하면서 말이다. 다만, 같은 표현을 전달할 때도 우린 좀 더 문학적일 필요가 있지 않을까. 각박하고 삭막해져만 가는 현대인의 삶에 가끔은 황당한 웃음이라도 흘릴 수 있는 여유가 그립다.
내 삶은 황폐해져만 가고 나는 고약해져만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