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직일기, -137일(2021.10.14)
휴직이라 하여 한가하지 아니할 것을 익히 모르는 바 아니었다. 그러나 언제나 각오했던 수준과 부닥치는 현실 사이의 간극은 존재하기 마련이다. 관건은 그것이 수용 가능한 범위인지에 달렸다. 아이의 입시일정이 시작된 지난주부터 두통에 시달리고는 있지만 아직은 버틸만하다. 그리고 끝이 보인다. 끝이 보일 때 인간은 정신이 육체를 지배하게 된다.
오늘은 아이의 두 번째 입시를 치르느라 아침 9시부터 대학로를 배회하고 있다. 1 지망 학교가 아니라서 그런지 첫 시험만큼의 긴장감은 없지만 난 언제 끝날 지 짐작하기 어려운 시간 동안 고사장 주변을 떠날 수 없다. 대학로가 지척인 곳에서 14년 동안 살고 있지만 이곳의 아침 풍경은 매우 낯설다. 그도 그럴 것이 나의 어린 시절부터 이곳은 젊은이들의 핫플레이스였고 지금도 가끔씩 아이들과 이곳에 들를 때마다 여전하다는 인상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침의 대학로는 조용하다. 25년 전쯤 지금은 사라진 학산도서관에 다니느라 아침 일찍 이곳을 찾은 적이 많았는데 그때와 다름이 없다. 상호와 간판이 바뀌고 낯선 건물들이 많이도 들어섰지만 대학로는 내게 오랜 추억의 장소다. 어릴 적 기억을 더듬으며 동숭동, 혜화동 인근을 둘러보다가 30년 가까이 버티고 있는 분식집을 발견하였고 반가운 마음에 떡라면과 김밥을 배부르게 먹고 나왔다.
우리나라 김밥 프랜차이즈의 양대산맥이라고 할 수 있는, 동네마다 한 곳 정도는 눈에 띄는 익숙한 간판(OO천국, O가네)이지만 이곳의 김밥집은 그중에서도 본점이다. 이 간판이 전국적으로 확산되기 전에 처음 대학로에 자리 잡은 이 김밥집은 여느 프랜차이즈점과는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깔끔한 주방, 정갈한 반찬, 북적이는 손님 등등 이 집이 유명한 맛집이라는 인상을 강하게 느끼게 해 준다. 특히 맛깔난 음식에 비해 저렴한 가격과 푸짐한 양은 여전하여 고급스러운 맛을 자랑하는 미슐랭 식당과는 뚜렷한 차별점이 느껴진다. 이 가격과 양으로도 임대료 높기로 유명한 대학로에서 28년이나 건재하다는 사실이 놀라울 따름이다.
안타까운 것은 웬만한 동네마다 보이는 프랜차이즈점은 절대 이 집의 수준을 따라오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오래전 모 여대 앞에 있는 같은 상호의 프랜차이즈점을 찾았을 때 말라비틀어진 단무지와 김치만으로 크게 실망했던 기억이 난다. 아무튼 이른 아침부터 문을 열어준 덕분에 나의 방황하는 아침을 푸근히 채워준 O가네 본점에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이 가게가 대학로에 처음 들어서고 3~4년쯤 되었을 때, 내가 결혼 전 대학로 인근에 살던 시절의 기억이 떠올라 옮겨본다. 이 가게 맞은편에는 좀 더 허름하고 비좁은 분식집이 하나 있었다. 간판이나 분위기가 그다지 눈에 띄지 않아 찾아들어가 보지 못했던 이 분식집이 갑자기 손님으로 북새통을 이루던 시절이 잠시 있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당시 공전의 시청률을 기록하던 주말연속극의 무대로 이 분식집이 등장했던 탓이다. 이곳 주변을 지날 때 한동안은 드라마 촬영 현장을 구경하러 온 사람들로 붐볐고 드라마가 종방된 후로는 분식집 벽면을 드라마에 등장한 가게 사진으로 온통 도배를 하여 이를 구경하러 온 손님들로 넘쳐났다.
그런 풍경을 오가며 접했던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영원한 단골집에 들르곤 했다. 아니나 다를까 드라마에 등장한 분식집의 호황도 잠시, 이내 예전의 휑한 식당으로 되돌아갔고 낡게 바랜 벽면의 사진만 을씨년스러운 모습으로 남았다가 몇 년을 더 버티지 못한 채 사라졌다. 당연한 귀결이었지만 식당의 본질은 맛과 서비스, 그리고 위생이 아닐까… 그런 기본에 충실했던 나의 단골집은 30년 가까운 시간을 한곳에서 버텨낸 것이리라.
코로나19로 인해 배달앱 전성시대가 도래한 탓에 이 집의 음식을 배달로 다시 접하게 된 지도 몇 달 되었다. 이 집의 오불 덮밥을 특히 사랑하는 나는 그 맛과 양에 더하여 신속한 배달에 늘 감탄하고 있다. 오늘은 아침부터 직접 가서 먹는 호사를 누렸으니 어찌 떡라면을 참을 수 있겠는가? 아침을 거르는 다이어트 중이지만 어찌 이 유혹을 참을 수 있단 말인가? 급격히 위장이 줄어든 탓으로 김밥을 1/3가량 남긴 것이 아쉬울 따름이다.
오늘의 감상,
본점에는 언제나 베테랑 안주인이 있기 마련이다. 카운터를 지키는 중년 여성은 군더더기 없는 주문 응대와 동시에 홀과 주방을 완벽하게 장악하는 신공을 보여주었다. 28년간 그녀가 그 자리를 지켰는지는 알 수 없으나 하루도 빠짐없이 아침 9시부터 밤 10시까지 영업하는 이곳이 일사불란하게 운영되는 것은 모두 그녀의 능력에서 나오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그분께 경외심을 갖게 되었다. 100년 가게가 흔치 않은 우리나라에서 이런 가게가 더 오래 남아 준다면 난 일흔이 넘어서도 이곳에 떡볶이를 먹으러 갈 것이라 다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