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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낙산우공 Nov 25.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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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의 비가역성에 대하여(2016.10.18)

물은 섭씨 100도가 넘으면 끓고 섭씨 0 아래로 내려가면 얼게 된다. 이와 같이 모든 물질은 환경의 변화에 따라 상태가 변하는 임계점을 갖고 있다. 물은 온도라는 환경의 변화에 따라 상태가 변하지만  온도를 높이거나 낮추어서 본래의 상태로 되돌아오는 복원력이 있다. 다시 말해 원형이 훼손되지 않는다. 이것이 순수한 물의 성질이다. 물에 이물질이 끼게 되면 복원력은 상실된다. 섭씨 100도의 비등점은 오로지 순정의 물에만 허용된다.


나는 이러한 물질 변화의 자연법칙이 인간관계에도 유사하게 적용된다고 믿는다. 사람 사이의 관계도 환경의 변화에 따라 상태가 변한다. 세상에 둘도 없이 친하고 서로 죽고 못 사는 관계도 서로 이익이나 피해를 주고받는 이해관계의 개입, 혹은 제삼자의 이간질, 오해, 입장의 차이, 사회적 지위, 경제력 등등 다양한 환경변화에 따라 평생을 증오하며 살아가는 원수지간이 되기도 한다. 특히 이러한 변화는 성인의 세계에서 두드러진다. 혈연지간에도 이러하니 학교, 직장 등에서는 오죽하겠는가.


친구 없이는 못 살 것 같던 시기도 철(?) 없고 세상 물정 모르던 학창 시절이 지나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식이다. 둘도 없는 친구, 연인, 가족은 있지만, 그들 없이는 못 사는 사람은 드물다. 다만 조금 외롭고 힘들고 슬프고 아플 뿐이다. 그 정도는 개인에 따라 또 다르게 나타날 것이다.  인간관계가 물과 같이 복원되지 못하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순정의 물은 임계점을 넘나들며 상태가 변하듯이 순정의 인간도 그러할 수 있다. 그들에겐 앙금이란 게 없다. 그들의 관계를 복원하는 데 장애가 되었던 오해가 풀리면 처음의 관계로 돌아가는 것이다. 순정의 인간들 사이에선 말이다.

문제는 여기에 있다. 완전무결하게 순수한 인간이 과연 존재할까? 특히 인간관계를 맺는 양자 간에 말이다. 순정의 물은 다양한 정수 작업을 통해 만들어낼 수 있지만, 타락한 인간이 다시 태어나는 방법은 종교의 힘을 빌지 않고는 불가능에 가깝다. 개과천선은 그야말로 책에서나 접하게 된다. 특히 사고체계가 완성되는 서른 즈음을 넘은 인간은 변화하지 않는다.

그 절정의 완고함은 죽는 날까지 지속된다. 그들에게 반성이란 없다. 철저한 자기 합리화의 이론으로 무장하고 있을 뿐 아니라, 자신의 이론을 공격하는 어떤 예리한 논리에도 대응하지 않는 한결같은 천연덕스러움까지 갖추게 된다. 특히 대한민국 사회에서는 놀라운 사회화 과정을 통해 모든 성인들이 천편일률적으로 자기 세계를 구축하게 만드는 기적이 일어나고 있다.

이들에게 대화와 타협이란 위장된 술수의 다른 말이다. 그저 주판알을 굴려보고 현실적인 대안으로 화해를 선택하는 것이다. 그들 사이에 나타는 입장 차이는 전혀 개선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악수를 하고 포옹을 하고 심지어는 러브샷을 일삼는다. 그들에게 위장된 평화는 이미 일상이 되었다. 정치인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모든 아이들이 본받고 따라 하게 되는 어른(?)의 세계를 말하는 것이다. 그 가식과 위선을 어찌할 것인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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