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MEMENTO MORI 01화

외할머니

Mememto mori 1

by 낙산우공

나의 외할머니는 1915년에 덕수 김 씨 양반 가문에서 태어나셨다고 한다. 욕이 걸쭉하기로 유명한 전라도에 사시면서도 외할아버지께 시집오실 때까지 험한 욕 한 가지를 모르셨을 만큼 점잖은 집안에서 곱게 자라셨다고 어머니께 들었다. 시골에 사시다가 큰외삼촌이 서울에 자리를 잡은 뒤에 상경하셨는데 돌아가실 때까지 내가 기억하는 할머니의 가장 험한 말은 "지랄"이었다. 이를 테면 속상하실 때 혼잣말 비슷하게 "헛... 참, 지랄...."이라고 되뇌시는 것을 몇 번 본 것 외에는 그 유명한 전라도 욕을 한마디도 듣지 못하였다. 그런 탓에 나의 어머니께서도 욕을 모르고 사셨으나 아버지께 시집오시고 친할머니와 고모들이 억센 욕을 잘하셔서 금세 배우셨다고 했다. 그 덕분에 나는 어린 시절 서울에 살면서도 전라도의 온갖 욕지거리를 다 들어보았다. 예컨대, "육시럴 놈, 오살 놈, 썩을 놈, 염병할 놈..." 나중에 알게 된 것은 이 것들이 모두 부모 자식 간에 쓸만한 표현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점잖은 외할머니는 근대식 교육을 받지는 못하셨으나 어릴 적에 언문을 배우셔서 책 읽기를 좋아하셨다. 나는 할머니 생신 때 책을 선물로 드린 적이 많았는데 그중 가장 좋아하셨던 책은 "한중록"과 "채근담"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언제나 방 안에서 조용히 돋보기를 쓰시고 책을 읽으시던 할머니는 가끔 우리 집에 들르실 때마다 나를 위해 연쇄점(70년대 말 유행했던 근대화 연쇄점)에서 180 원하는 새우깡을 사 오시곤 하였다. 그렇게 반나절 정도 우리 집에 머무시는 날이면 말없이 거실에 앉아계시다가 가끔 나와 민화투를 치셨던 기억이 난다. 난 할머니께 화투를 배웠으나 고스톱은 형들한테 배웠다. 외할머니께서는 언제나 조용하셨고 누구에게도 싫은 소리를 못하셨다. 서울에 오시게 된 것도 시골집에서 기르던 개가 남의 집의 닭을 죽였다고 이웃집 여자가 소란을 피워 돈을 치러주고 올라오셨다고 한다. 할머니의 개가 죽였다는 증거는 없었지만 말썽이 생기는 게 싫고 동네 사람 앞에서 부끄러운 마음에 못살겠다고 하셨단다. 장수하신 탓에 지루하고 외로운 서울살이를 꽤나 오래 하셨던 할머니께는 참으로 안타까운 사건이었다고 나중에 생각했다.


외할머니는 서울의 큰외삼촌 댁에서 25년 가까이 두 손주를 키우시며 사셨는데 할머니를 모셨던 나의 큰 외숙모는 나중에 가족과 떨어져 살게 된 후에도 외할머니를 가장 그리워하셨다고 한다. 나의 외할머니는 아흔여섯에 돌아가셨고 사시는 동안 큰 병을 앓지 않으셨기에 주변에서는 호상이라고들 하였지만 그건 속내를 모르는 사람들의 이야기였다. 외할머니께서 돌아가신 2010년에 나는 3일장 내내 빈소를 지켰다. 어릴 적 할머니에 대한 애틋한 기억 때문이기도 하였으나 말년에 너무나 쓸쓸히 세상을 등지신 그분의 넋을 조금이라도 위로해 드리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외할머니께서 돌아가시기 수개월 전에는 큰손자라고 할 수 있는 이종사촌 형이 쉰이라는 젊은 나이에 대장암으로 세상을 떴다. 가뜩이나 말년에 운세가 안 좋으셨던 할머니께는 아무도 그 사실을 말씀드리지 않았는데 사촌 형 장례를 치른 전후로 부쩍 사촌 형의 안부를 물으셔서 그때 외할머니를 모시던 막내 이모는 둘러대느라 애를 먹었다는 말씀을 하셨다.


외할머니는 아흔여섯에 돌아가시기 전에도 두 번의 죽을 고비를 넘기셨던 것으로 나는 기억한다. 첫 번째는 내가 군대에 복무하던 1994년 경이었는데 팔순을 갓 넘기셨던 할머니께서 교통사고를 당하셨다. 이때를 내가 생생하게 기억하는 것은 나의 꿈 때문이다. 나는 평소에도 잠을 깊이 못 자는 편이고 마음이 불편할 때는 꿈을 많이 꾼다. 그때의 꿈은 생생하면서도 흉측하였다. 외할머니는 내 꿈에 자주 등장하는 인물이 아니셨는데 생뚱맞게 꿈에 나타나셔서는 목에 줄을 메시는 거였다. 누가 봐도 자살하는 모습이었는데 내게 안부를 물어오셨다. 그 뒤로도 외할머니는 종종 내 꿈에 나타나신다. 돌아가신 분이 꿈에 등장하는 것은 편한 곳에 가시지 못한 것이라는 이야기가 생각나서 그런 날은 하루 종일 마음이 뒤숭숭하다. 아무튼 그날 잠에서 깬 뒤 꺼림칙한 마음이 가시지 않았다. 당시 내가 복무하던 부대에는 내무반에서 근무장으로 이동하는 길 중간에 공중전화 부스가 있었다. 가끔 시간이 뜰 때 그곳에서 집에 전화를 걸곤 했기에 그날은 작정하고 일찍 나와서 집에 전화를 했다. 어머니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불쑥 집에 별일 없냐고 물었다. 어머니는 무슨 별일이 있겠냐고 둘러대셨는데 내가 대뜸 "외할머니는 잘 계시지?"라고 되묻자 당황하는 목소리로 외할머니의 사고 소식을 전했다.


군에 있는 아이가 공연히 심란해할까 봐 이야기를 안 하려고 하셨다면서도 뜬금없이 외할머니 소식을 묻는 것에 놀라신 어머니께서 해주신 이야기는 대강 이랬다. 집 근처 산책을 하시다가 차에 치이셨는데 여러 곳에 골절이 되었다고 한다. 교회 목사가 모는 차였다는 말도 기억이 난다. 병원 중환자실로 모셨는데 너무 연로하셔서 수술 중에 사망하실 수도 있다고 하여 특별한 치료를 하지 않은 채 방치되어 계신다고 했다. 어머니나 다른 형제분들도 그렇게 돌아가실 것으로 생각할 뿐 아니라 은근히 그렇게 되길 바라는 눈치도 보였다. 당시에만 해도 팔순이면 꽤 장수하셨다고 생각하는 분위기이긴 하였다. 난 임종을 보지 못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예정되어 있던 정기휴가를 당겨서 주말에 외할머니를 찾아갔다. 중환자실에 계셔서 면회가 제한되는 바람에 혼자 병실에 들어갔는데 외할머니를 보자마자 와락 눈물이 쏟아져서 주위를 제대로 둘러보지는 못했다. 뭔가 복잡한 의료기구들에 둘러싸여 계셨고 의식은 또렷하셨지만 통증이 심해 보였다. 우는 나를 달래려고 몇 말씀을 하셨는데 말씀 중에 사래가 들었는지 기침을 하셨고 그 때문에 통증이 더 심해져서 괴로워하셨다. 나는 경황없이 몸 잘 챙기시란 말만 남긴 채 서둘러 돌아섰는데 나오는 길 내내 어머니는 굳이 왜 휴가를 당겨서 나왔냐고 타박을 하셨다. 조금만 더 기다리면 장례 치르러 나올 수 있을 텐데라는 말이 숨겨져 있는 말투였다.


그러나 어머니의 기대가 실현되지는 않았다. 할머니는 신기하게도 아무런 치료도 없이 건강해지셔서 몇 달 후 퇴원하셨다. 골절이 되었던 뼈는 시간이 오래 걸리긴 하였지만 제대로 회복이 되었다. 어머니는 그 뒤로도 그때 돌아가셨어야 했는데 아쉽다는 투의 말씀을 외할머니 앞에서 태연하게 하셨고, 나는 살아계신 분에게 그런 말을 하는 건 듣기 좋지 않다고 몇 번이나 쏘아붙였다. 이제 팔순을 훌쩍 넘어버리신 내 어머니께 지금 같은 말을 누군가 한다면 어떤 마음이실까 궁금해지기도 한다. 당시에 어머니의 말씀이 할머니를 걱정하여하신 것이라고 믿지만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그런 말을 태연자약하게 내뱉는 걸 받아들이기 어렵다. 아무리 당신의 어머니께서 여러 가지로 힘든 말년을 보내시고 계셨어도 말이다. 당시 외할머니는 평온했던 삶이 시시각각 무너지고 계셨던 것은 맞다. 그 첫 번째는 1991년 겨울 둘째 사위인 내 아버지의 사망이었다. 나의 아버지는 쉰여섯이라는 이른 나이에 아무런 지병도 없이 하루아침에 교통사고로 명을 달리하셨다. 그야말로 청천벽력 같은 일이었고 그건 할머니께도 마찬가지 었다. 할머니께서 가장 믿고 의지했던 내 아버지의 부재는 그 뒤에 할머니께 닥칠 재앙을 암시하는 전조와도 같았다.


외할머니께 닥친 두 번째 위기는 큰 외삼촌댁의 몰락이었다. 몰락이라는 표현이 어울릴 만큼 급전직하로 가세가 기울었고 급기야 가정이 해체되기에 이르렀다. 큰외삼촌은 혈혈단신으로 상경하여 자수성가하신 분이다. 주변의 도움을 일부 받았지만 아무런 배경도 번듯한 스펙도 없이 홀로 사업체를 일구셨고 꽤 탄탄한 기반을 닦았다. 어릴 적에 외가에 갈 때마다 내가 부러워했던 건 우리 집과 확실히 비교될 만큼 풍족했던 삼촌댁의 살림살이였다. 외숙모는 미모와 교양뿐 아니라 인심도 좋으셨고 나의 사촌동생이기도 한 1남 1녀의 자녀들은 남부러울 것 없는 환경에서 구김살 없이 반듯하게 자라고 있었다. 그랬던 큰 외삼촌댁에 균열이 생긴 것은 벤처 붐이 일기 시작했던 1990년대 말 삼촌께서 새로운 사업구상에 몰두했던 것이고 그 새로운 길이 결코 평탄치 않았던 탓이다. 자수성가한 사업가의 공통점은 자기 확신이 너무 강하여 아무도 그들을 만류할 수 없다는 것이다. 결국 그들이 확신한 길의 성패가 그의 인생을 나락으로 떨어뜨릴 수도 있다. 안타깝게도 나의 삼촌은 20년 가까이 구가하던 전성기를 뒤로 하고 놀라운 속도와 관성으로 무너져 내렸다. 외할머니는 온 가족이 뿔뿔이 흩어진 큰 외삼촌댁에 더 이상 머무실 수 없었고 나머지 1남 3녀(시골에서 농사를 지으시던 큰 이모를 제외하면 1남 2녀)의 자녀에게 몇 달씩 몸을 의탁하는 신세가 되셨다. 아흔이 넘으셔서 말이다. 내 어머니의 한탄은 거기서 비롯된 것이다.


앞에서 얘기했듯이 외할머니께서는 두 번의 죽을 고비를 넘기셨는데 그 두 번째가 바로 큰 외삼촌댁의 몰락기 중반쯤에 일어났다. 그때는 아직 가족이 해체되기는 전이었는데 이미 큰외삼촌은 가족을 건사할 수입이 없으셨고 이곳저곳에서 받은 대출금을 상환하지도 못하여 집에는 각종 채무상환을 독촉하는 서류나 국세청의 세금 체납 경고장이 쌓여가던 시기였다. 외숙모는 나름대로 외부활동을 하시면서 두 아이의 학비를 벌고 계셨지만 그마저도 역부족이었던 것 같다. 그렇게 우울한 가정에서 무력감에 시달리던 외할머니께서는 본인의 존재가 자녀들에게 부담이 되는 것에 비관하셔서 약을 드셨다고 한다.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외숙모께서 복용하던 수면제를 대량으로 흡입하셨던 것 같다. 늦지 않게 쓰러져 계신 할머니를 발견한 사촌동생의 대처로 목숨을 잃지는 않으셨지만 나중에 소식을 들은 나는 가슴이 먹먹하고 답답한 심정을 가눌 수 없었다. 10년 전 군대에서 꾸었던 꿈이 재현되는 것 같은 무거운 마음이 짓눌러 왔다.


외할머니의 삶이 팍팍해질 수밖에 없었던 가장 큰 이유는 큰아들을 제외한 나머지 자녀들의 삶이 풍요롭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의 어머니는 여기에서 제외될 수도 있는데 당시에 어머니는 아버지의 부재로 인해 급격하게 불안감이 엄습하셔서 그 사실을 부정하였다. 그리고 환갑이 넘은 나이에 친정어머니를 떠안고 싶은 마음이 눈곱만큼도 없으셨다. 부모를 부양하는 것은 아들들의 몫이라는 가부장 사회의 윤리가 뿌리 깊게 박혀 계셨던 탓에 이 문제를 거론하는 내게 언제나 당당하셨다. 내가 결혼한 이후 대략 두 달 정도 외할머니께서 어머니댁에 머무셨던 적이 있는데 불편함을 참지 못해 총총히 막내 이모 댁으로 옮겨가셨던 일이 기억난다. 그렇게 눈칫밥을 먹으며 이 집 저 집을 전전하셨던 외할머니께서는 다행히도 마지막 몇 년간 막내 이모 댁에 안주하셨다. 성품이 좋으셨던 막내 이모 내외분께서는 이미 시부모님을 모시고 계셨던 탓에 외할머니를 모실 형편이 아니었는데, 시아버지께서 돌아가신 후로 이모의 시어머니께서 늘그막에 말벗하기 좋으시다고 외할머니를 찾으셔서 마음 편히 지내셨다. 그나마 돌아가시기 전 몇 년간 다시 평안한 삶을 보내신 게 참으로 다행이었다고 생각한다.


외할머니의 임종은 그분의 성품만큼이나 간소하였다. 노환으로 병원을 다니시다가 입원을 하셨고 상태가 악화되어 중환자실로 옮긴 지 며칠이 안되어 돌아가셨다. 중환자실로 옮겼다는 소식을 듣고 마지막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 주말에 시간을 내어 찾아갔지만 눈을 뜨고 계실 뿐 거친 숨소리만 들리는 상황이었다. 난 또 울고 말았지만 다른 모든 이들이 너무도 담담하여 잠시 무안했던 기억이 난다. 돌아가신 이후는 사실 더 간소하였다. 어머니와 형제분들은 평안한 얼굴로 3일장을 치르며 할머니를 선산에 모시고는 가벼운 마음으로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다. 유일하게 걱정이었던 것이 시골에 있는 선산에 모실 때 동네 주민들이 집단으로 방해를 하는 일이 잦다는 풍문이었다. 다행히도 그런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고 삼우제도 외삼촌 두 분만 다녀오셨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그렇게 외할머니는 조용히 생을 마감하고 우리의 기억 속에서도 잊혀 갔다. 어머니는 외할머니의 입관식에서 과하게 곡을 하셨지만 나오자마자 화장을 고치고 여느 때와 다름없는 모습으로 돌아왔다. 난 늘 상가에서 상주가 곡을 한 뒤 밝게 웃으며 술을 받는 모습이 낯설다. 모두들 그렇게 일상으로 돌아갔다.


자연사의 사전적 의미는 노쇠하여 자연히 죽는 일을 말한다. 자연 생태계에서 일어나는 일이란 늘 자연스러운 현상이듯 자연사도 병사나 돌연사나 사고사와 달리 자연스럽게 자연으로 돌아갔다는 좋은 뜻으로 쓰이는 것 같다. 그러나 나는 내 외할머니의 자연사를 목도하면서 묘한 감정이 교차했다. 죽음이 과연 자연스러울 수 있을까? 애도의 감정이 생략된 모든 죽음은 허망하고 서먹하다. 세상의 어떤 죽음에도 망자의 삶이 배제될 수는 없다. 그러나 오늘날 장례식장에서 상주와 문상객들이 보이는 풍경엔 언제나 망자는 빠지고 상주의 인연들로 가득하니 하물며 망자의 삶이 들어설 틈이 있겠는가? 1915년부터 2010년까지 무려 아흔여섯 해를 살다 가신 나의 외할머니를 이제 아무도 기억하지 못한다. 올 초였던가? 몸도 마음도 만신창이가 되어가던 나의 꿈에 홀연히 나타나셨던 외할머니의 모습이 너무나 서늘하였기에 이제야 나의 외할머니에 대한 기억을 어렴풋이 더듬어 이 글을 남긴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빌며 평안히 잠드시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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