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ento mori 2
내 어머니는 2남 3녀 중 둘째이시고 위로 언니 한분과 아래로 남동생 둘, 그리고 늦둥이 막내 여동생이 계시다. 그 막내 이모도 회갑이 훨씬 넘으셨다. 나의 큰외삼촌은 어머니와 열 살 가깝게 터울이 지고 그 다섯 살쯤 아래에 둘째 외삼촌이 계시는데 두 분 다 당시에는 드물게 서른이 훌쩍 넘은 나이에 결혼을 하셨다. 덕분에 나 역시 늦둥이 막내지만 외사촌 형제들과 적게는 일곱 살에서 많게는 스무 살 가까이 차이가 난다.
오늘은 둘째 외삼촌의 총각딱지를 떼어 준 나의 둘째 외숙모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나의 외삼촌은 외할머니와 함께 시골에서 농사를 지으셨는데 할머니께서 서울의 큰외삼촌 댁으로 올라오시면서 함께 상경하셨다. 처음엔 큰외삼촌의 조그만 사업체에서 같이 일을 하시다가 얼마 안돼 내 아버지의 가게로 직장을 옮기셨고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그 가게를 물려받으셨다. 내 아버지는 20년 넘게 서울 중앙시장에서 기계공구상을 하셨는데 손에 기름때 묻히고 사는 당신의 일을 좋아하지 않으셨고 자식들에게 가업으로 물려주실 생각이 전혀 없으셨다. 그래서 둘째 외삼촌은 우리 집과 단순히 혈연을 넘어 이래저래 깊은 관계를 맺고 살았다.
외삼촌은 혼기를 놓쳐 서른 중반이 넘은 나이에 외숙모와 결혼을 하셨는데 당시 외숙모는 20대 중반이라 삼촌과는 나이 차가 꽤 나는 편이었다.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내가 초등학교 고학년 때쯤 두 분이 결혼을 하셨고 우리 집 근처에 신혼살림을 차려 거의 한가족처럼 지내다시피 했다. 외삼촌과 달리 말씀을 잘하시고 쾌활하셨던 외숙모는 당시 대학생이었던 나의 큰형과도 격의 없이 지냈다. 한 번은 군대에 가 있던 형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본인을 오랫동안 멀리서 사모해오던 익명의 아가씨인 척하여 형을 당황시킨 적도 있었다. 어릴 때 피겨스케이트 선수를 하셨다고 하니 꽤 좋은 환경에서 구김살 없이 자라셨던 것으로 나는 짐작한다.
키가 작고 왜소한 편이셨지만 외가에 모임이 있을 때는 분위기 메이커 역할을 톡톡히 하셨고 키가 크고 성격이 시원시원한 큰 외숙모와도 원만하게 잘 지내셨던 기억이 난다. 그런 둘째 외숙모에게 시련이 닥친 것은 첫째 아들을 낳고 몇 해 안되었을 때였다. 외삼촌이 남들보다 한참 늦은 나이에 장가를 가서 얻은 첫아이가 다행히(?) 아들이었기에 주위에서는 모두 축하 일색이었다.(그땐 그런 분위기가 당연스럽게 받아들여졌다. 그것이 정당했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유난히 하얀 피부에 귀염상을 타고난 나의 외사촌 동생은 그렇게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았다. 갓난아기를 유난히 예뻐하는 어머니는 사촌동생을 자주 집에 데려오셨고 동생이 없는 나 역시 많이 안아주었다. 그런 아이가 남들과는 조금 다르다는 것을 발견하는 데에는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사람들과 눈을 마주치는 일이 잘 없었던 아이를 보며 혹시 시력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닌가 걱정하셨던 외숙모는 병원에서 청천벽력 같은 진단을 받고 한동안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셨다. 나의 사촌동생은 자폐 증상과 발달장애가 동시에 나타는 케이스였다. 처음엔 아무도 믿으려 하지 않았지만 아이가 자랄수록 병원의 진단은 더욱 뚜렷하게 나타나기 시작했다. 동생은 주변에서 관리해 주지 않으면 체중이 과하게 불었고 발에도 문제가 있어서 교정을 해주지 않으면 정상적으로 걷지 못했다. 말을 하기는 하였지만 사람들과 소통이 어려웠고 시력도 많이 안 좋아서 어릴 때부터 꽤 두툼한 안경을 써야만 했다. 다행히 신경질적이거나 공격적인 성향은 전혀 없는 순한 아이라 주위에 피해를 주는 일은 거의 없었다. 정이 많고 착한 아이였다.
그러나 외숙모는 현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하셨다. 처음에는 삼촌이 늦은 나이에 결혼해서 얻은 아이라 이런 문제가 생겼다고 삼촌을 비난하셨고 그 이야기에 공연히 화가 치민 내 어머니와도 불화를 겪으셨다. 하지만 현명했던 외숙모는 이내 이성을 되찾으셨고 남은 생을 온전히 아이에게 바치기로 결심한 듯했다. 아이를 정상적인 아이로 키우겠다는 일념으로 장애등급 판정을 거부하고 극진하게 아이를 돌보시면서 교회에도 나가기 시작하셨다. 억장이 무너지는 그 마음을 겪어보지 않은 내가 어찌 헤어릴 수 있겠는가? 아이를 낳고 키워보면서 가끔씩 그때 숙모의 마음을 들여다보지만 내가 함부로 말할 수 없는 엄숙함을 느낀다.
나의 외사촌 동생은 외숙모의 희생과 헌신으로 특수학교에 가지 않고 일반학교에서 초중고 정규과정을 무사히 마치고 특별전형으로 대학에서 사회복지학을 전공하였다. 그 아이는 서른이 넘은 지금도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혼자 살아가기 힘들지만 그 아이를 일반학교에 적응시켜 졸업까지 하게 한 외숙모의 열정은 나를 숙연하게 만든다. 발달장애 특수학교의 교사인 나의 아내는 내 사촌동생을 처음 본 뒤에 외숙모를 경이로운 분이라 하였다. 현재 대한민국의 특수학교가 장애아동의 교육활동보다는 돌봄에 지친 부모의 역할을 잠시 대신하는 위탁기관에 머물러 있는 현실에서 보면 말이다. 혹자는 수긍하지 않겠지만 우리나라의 특수교육은 정말 후진적이다. 아내를 20년 가까이 지켜본 나의 견해일 뿐이지만 말이다.
숙모는 큰 아이와 꽤 터울이 지는 둘째를 낳았는데 딸이었고 제 오빠와 달리 건강하고 총명한 아이 었다. 그 아이는 공부를 잘하여 소위 명문대학을 나왔고 전기공학을 전공하여 국내 굴지의 대기업에 단번에 취업하기까지 하였다. 둘째 외삼촌 내외분께서는 이보다 나은 결과가 없을 만큼 행복에 겨워 하셨다. 딸아이 이야기만 나오면 입에 침이 마르도록 자랑을 하셨지만 난 두 분을 뵐때마다 실컷 자랑하시라고 열심히 추임새를 넣어드렸다. 그분들에게는 그럴 자격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둘째를 임신하여 낳고 자라기까지 그분들의 노심초사가 어떠하였을지 우리가 감히 짐작이나 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인생사 새옹지마라는 말과 같이 행복과 불행은 교묘하게 맞붙어서 교차하고 만다. 나는 외숙모의 삶을 지켜보면서 다시 한번 뼈저리게 그 현실을 체감하였다. 나의 둘째 외숙모는 고작 50대 중반의 한창 나이에 뇌졸중으로 생을 마감하셨다. 그 황망한 소식을 들었던 게 불과 4~5년 전의 일이다. 주말에 황급히 장례식장을 찾은 나는 오열하는 외삼촌과 사촌동생들을 보면서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전날의 상황은 이랬다.
대학을 졸업하고 대기업에 입사한 둘째는 연구소가 있는 수원에서 생활하다가 주말을 맞아 상계동에 있는 집에 오는데 바로 그날이었다고 한다. 고생하는 딸을 위해 오전부터 맛있는 음식을 준비하던 숙모는 아마도 날아갈 듯 흥겨운 기분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때마침 집에 걸려 온 한통의 전화를 받으려고 황급히 거실로 향한 숙모가 갑자기 뒷목을 잡고 쓰러지셨다. 집에는 큰 아이와 숙모 단 둘 뿐이었고 나의 사촌동생은 쓰러진 엄마를 붙잡고 울면서 계속 일어나라 외쳤던 듯하다. 엄마가 깨어날 기미가 없으니 동생은 아빠에게 뒤늦게 전화를 했지만 이미 골든타임을 놓쳐버린 상황은 되돌릴 수 없었다.
문상을 온 나와 가족을 본 사촌동생은 느닷없이 내 아내의 품에 안겨 울었다. 동생은 서른을 넘긴 나이었지만 엄마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아이 같았다. 그런데 엄마가 사라졌으니 앞이 캄캄했던 것 같은데 그나마 내 아내가 그 녀석에게는 엄마 같은 인상을 준 것이 아니었나 싶다. 외숙모께서 그렇게 허망하게 세상을 등지고 얼마 안 되어 그 집의 둘째는 같은 회사 동료와 결혼을 했고 외삼촌은 장애가 있는 큰아이를 돌보며 혼자 사신다. 몇 년이 흐른 뒤에 어머니를 통해 들은 소식은 외삼촌이 사촌동생 때문에 재혼도 못하고 힘들게 사신다는 이야기였다. 홀로 남은 사촌동생이 걱정되었다. 그리고 외숙모께서 편하게 눈을 감지 못하시겠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그 집의 둘째는 어려서부터 제 오빠를 끔찍하게 챙겼고 가정을 가진 지금도 다름이 없겠거니 생각하지만 큰 녀석은 엄마 없이는 하루도 못 사는 아이 었다. 얼마 전 친척 결혼식에서 만났던 그 아이는 유난히 사람을 찾았다. 대번에 외롭고 정이 그리운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 아이도 이젠 나이 든 티가 제법 났다. 안타깝고 측은하였다. 나는 그런 불편한 마음으로 하루를 보내고 이내 잊어버렸지만 그 아이는 생이 끝나는 날까지 엄마를 그리워하며 살 것이다.
우리가 사는 삶은 대개 행복과 불행이 교차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불행이 연속되다가 잠깐 행복이 깃드는 것 같다. 그런 찰나의 행복이지만 여운이 워낙 강하여 일생을 지배하는 불행을 거뜬히 이겨내는 것이 아닐까? 나의 둘째 외숙모는 내가 그분을 알고 지낸 시간 중에 8할 이상이 힘겨우셨다. 그리고 아주 잠시 행복이 찾아왔으나 이내 사라졌다. 그런 외숙모의 삶은 많은 이들에게 잊혔다. 외숙모에게 하나뿐인 형제였던 남동생도 어머니도 아버지도 이제 이 세상 분이 아니다. 외롭고 고단했던 그분의 삶을 누군가는 기억해야 할 것 같아 이 글을 남긴다.
당신은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을 단 한 가지도 빼놓지 않았을 뿐 아니라 아무도 할 수 없을 것 같았던 일까지 해내셨습니다. 너무 많은 일을 하셨기에 좀 더 일찍 쉬어야 했는지도 모릅니다. 이젠 정말 편히 쉬시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당신의 이름을 기억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