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S는 끝이 없어라

휴직일기, -74일(2021.12.16)

by 낙산우공

이제 막 예고 입시를 마친 둘째는 아직도 갈 길이 멀다는 걸 알고 있었다. 바로 3년 전 큰애와 똑같은 상황이었기 때문에 장르는 달라도 험한 수험생의 시간이 남아 있다는 것을 모를 리 없었다. 특히 예고는 3년 내내 체계적인 수험과정이 진행된다. 그래서 더욱 얼마 남지 않은 휴식의 시간을 보장해 주고 싶었다.


합격소식을 접하자마자 어떻게 알았는지 온갖 학원 광고 문자가 쏟아졌고 대부분 겨울방학에 시작하면 이미 늦으니 11월 말부터 내신 준비반에 들어오라는 내용들이었다. 미대 입시에 교과 내신이 중요하다는 건 익히 알고 있었지만 대치동 학원가는 합격자 발표와 함께 프로그램을 돌리고 있었다. 예고 별 교과 시험 출제경향을 분석하고 교과 선생 별 특징까지 소개하는 비공개 유튜브 동영상 서비스 링크가 날아왔다.


그깟 일에 흔들려선 안된다는 생각을 마음속으로 다시 한번 다지며 우리 아이에게는 마음껏 휴식의 시간을 주고 있다. 다만 손이 굳어지는 걸 걱정하는 아이를 위해 주 2회 미술학원 수업을 받고 있지만 하루도 거르지 않고 12시간을 달렸던 입시 때와 비교하면 아이는 행복하다. 교과 공부를 포기할 순 없으니 겨울방학이 되면 뭐라도 시작해야겠지만 아직은 아무것도 강요하고 싶지 않다. 아이는 최근 학교에 가는 시간을 빼면 침대와 한 몸이 되었다.


아직 3년의 고교생활이 기다리는 둘째에게는 어느 정도 책임감을 갖고 있었지만 오늘의 이야기는 예비 대학생인 큰애가 주인공이다. 중학교 2학년 때 남들보다 좀 늦게 시작한 딸아이의 무용전공은 우여곡절의 5년 동안 나 역시 초주검이 되어갔다. 누구보다 성실했던 아이를 보며 내가 무너지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 휴직까지 감행하였지만 올 한 해는 정말 체력적으로 정신적으로 한계를 실감했다.


어쨌든 고생한 보람은 남아 큰아이의 입시는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되었고 나는 벅찬 해방감을 만끽하였던 것도 잠시, 여전히 딸아이의 애프터서비스에 상당한 시간을 할애하고 있다. 자동차 운전면허를 따려는 아이를 위해 운전면허 필기시험을 따라다니고 기능시험 응시를 위해 자동차 운전학원에 등록을 해주는 건 물론 친구와 놀다가 갑작스럽게 연락이 온 알바 면접시간에 맞추느라 부랴부랴 이력서를 뽑아 데려다 주기까지 하였다.


오늘은 백화점 식음료 매장에 알바 자리를 구한 아이의 보건증을 발급받기 위해 건강검진을 다녀왔다. 지난주에는 친구와의 바다여행을 아들과 함께 동행해 주기까지 도무지 끝이 없다. 여행에 가져갈 가방을 골라놓고는 친구와 롯데월드에 간 딸을 대신해 동대문 아웃렛 매장을 뒤지기도 하였고, 귀에 피어싱을 하고 싶다는 애를 데리고 여대 앞 피어싱 전문점에도 두 번이나 들렀다. 딸아이를 데리고 다니는 한낮의 아빠는 많은 이들에게 낯설다. 나도 이런 내가 낯설다.


아이에게 가끔 푸념을 늘어놓지만 딸아이는 항상 계면쩍은 웃음으로 대신한다. 딸바보 소리를 많이 듣지만 나도 내가 바보 같다. 아내는 매번 끌려다니는 나를 타박한다. 끌려다니는 게 분명하지만 어쩌면 지난 5년의 시간을 끝내기 위한 나만의 마지막 이벤트인 것 같기도 하다. 징글징글했던 시간을 단칼에 잘라내기에는 무언가 허전함이 남았나 보다.




오늘의 감상,

오후에 딸아이 보건증 발급을 위해 건강검진센터에 들렀을 때 일이다. 코로나19로 인해 대부분의 보건소가 보건증 발급 업무를 중단했기 때문에 별 수 없이 4배의 검진료를 받는 병원에 갔다. 주차장에 도착하여 엘리베이터를 막 타려 하던 순간 딸아이가 신분증을 챙겨 오지 않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허망한 마음과 함께 본인의 알바를 구하기 위해 보건증을 받으러 오면서 가장 기본적인 것을 놓친 아이게 타박을 했다. 다시 돌아가야 하나를 잠시 고민했지만 여름에 생애 처음으로 발급받은 주민등록증을 대리 수령했던 내가 기념으로 사진을 찍어 아이에게 보낸 기억이 났다. 다행히 사진으로도 신분확인이 되어 헛걸음을 하진 않았다. 이 또한 내가 아니었으면 두 번 걸음을 해야 했던 것, 진정코 나의 A/S는 끝이 없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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