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단추의 교훈

휴직일기, -71일(2021.12.19)

by 낙산우공

역사와 마찬가지로 인생에도 만약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난 언젠가부터 미래에 대한 기대와 꿈보다는 과거의 한 시점에 대한 아쉬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때의 선택이 조금만 달랐더라도 내 삶의 흐름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을 것만 같았다.


나의 아쉬움은 학창 시절에 공부를 좀 더 열심히 했더라면 혹은 철이 좀 일찍 들었더라면과 같은 실없는 망상이 아니라 진로 선택에서 조금만 더 자기주도적이었더라면과 같은 현실적인 안타까움에 가깝다. 딱히 무엇이 되고 싶지도 어떤 것을 하고 싶지도 않았던 고교시절, 2학년에 진학하기 전에 문•이과 선택에서부터 대학입시에 이르기까지 나는 주관을 잃지 않으려 노력했지만 주변의 요구에 이끌려 간 경향이 강했다.


나에게는 명확하게 의사표현을 해야 할 만큼 간절하고 절실한 목표가 없었던 탓이기도 하지만 세상 물정 모르는 고등학생이 기호와 취향에 따른 진로선택을 한다는 건 언감생심 쉽지 않았던 시대적 배경과 집안 분위기도 톡톡히 한몫했던 것을 부정할 수 없다. 나의 관심분야 따위는 어른들에게 일말의 관심조차 끌지 못했다.


당시에 우리 집에서 대학이란 안정적인 혹은 유망한 직업을 갖기 위한 예비학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나의 적성과 특기는 알 필요도 없고 알고 싶지도 않은 것으로 취급받았으며 조금이라도 더 좋은 대학, 조금이라도 더 유망한 학과에 입학하는 것이 지상과제였던 시대였다. 그때 나는 단 하나의 항변으로 전공을 가족(?)의 뜻에 양보하는 대신에 학교만큼은 내가 선택하겠다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나의 불행은 시작되었다.


[10개월이라는 나름대로 기나긴 휴식의 시간을 보장받았기에 나이 오십에 이런 부질없는 회상을 하고 있는 것만큼은 분명하다. 그러나 나에게는 지난 30년간 풀리지 않는 미련의 감정을 이제는 한 번쯤 돌이켜 볼 필요가 있기에 이 글을 남기고자 한다.]


대학 입시원서 제출을 목전에 두었던 1990년 초겨울이었다. 수시 6개, 정시 3개 포함 총 9곳의 대학을 지원할 수 있는 요즘과 달리 당시에는 전기대학 1곳 만을 지원할 수 있었고, 전기대학 입시에 탈락하면 후기대학 1곳을 더 지원할 수 있었다. 1988학년도부터 시작된 선지원 후시험 제도에 따라 11월경에 지원대학을 결정하고 12월 중순이 조금 지나 지원대학에서 대학 입학 학력고사(수능과는 좀 다르지만)를 치렀다. 그렇게 한해를 꽉 채운 연말에야 입시일정이 끝났다.(그것도 전기대학에 한정하여)


당시에는 3학년 내내 치른 모의고사 성적과 막판 입시원서 제출을 앞두고 몰아서 보는 다섯 차례의 배치고사 성적을 바탕으로 지원대학을 결정해야 했다. 나의 고민은 여기서 시작되었다. 딱히 가고 싶은 대학도 전공도 없었으며 2학년부터 시작된 이과 수학의 학업량에 질려버렸던 나는 내가 이공계와 맞지 않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그렇게 간당간당한 수학 성적 때문에 소위 명문이라는 학교엔 함부로 원서를 들이밀 수 없는 형편이었다.


이때 나의 입시 상담역은 과거 놀라운 대학입시 성과를 보유한 나의 큰형이었다. 당시 대학을 갓 졸업하고 촉망받는 글로벌 IT기업에 재직 중이던 형은 전공과 진로에 대해 분명한 의지가 없어 보이는 나에게 두 가지 선택지를 제안했다. 전공 불문하고 소위 간판 좋은 대학 중에 내 성적에 맞는 학과에 지원하는 안과 대학 불문하고 전도유망한 컴퓨터계열의 학과를 지원하는 안이 그것이었다.


이미 이공계 진학에 대한 거부감이 강했던 당시의 나는 문과로 전과하여 재수할 각오를 내심 하고 있던 상태였기 때문에 형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어쨌든 입시는 치러야 했고 떨어지더라도 이왕이면 좋은 대학에 지원할 생각이어서 첫 번째 안을 선택했다. 문제는 2학기 때 갑자기 바뀐 담임선생님이 발목을 잡은 것이다. 기존 담임선생님의 갑작스러운 사직으로 엉겁결에 우리 반을 맡으신 선생님은 정년이 얼마 남지 않아 최근 입시 담당 경험이 전무한 분이셨다.


나는 흔히 말하는 명문 대학의 순서에 따라 내 모의고사 평균 성적을 기준으로 합격권에 있는 학과들을 추렸다. 그리고 담임선생님과 상담을 시작하였는데 그때까지 아이들 이름도 외우지 못했던 담임선생님은 대뜸 나를 웃음거리로 만들고야 말았다. 반에서 3등 안에도 들지 못하는 내가 어떻게 SKY 운운할 수 있느냐가 대략의 요지였다. 나는 제법 최근 3년 치 입시결과 자료를 근거로 제시했는데 선생님은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입시 상담에 지친 3학년 담임선생님들 앞에서 나를 조롱했다.


내가 당시로는 가장 인기 없는 학과들만 추리긴 했지만,(그 학과가 어떤 곳인지는 오해의 여지가 있기에 밝히지 않는다) 나름의 논리적 근거에 기반하여 주장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나의 주장은 단칼에 거절당했다. 학교 간판 따겠다고 듣지도 보지도 못한 전공을 찾아낸 나의 행위가 스스로도 그렇게 떳떳하지 않았던 나는 바로 형이 제안한 1안을 폐기하였다. 이 지점에서 나는 당시의 담임선생님을 용서한다. 그의 무관심과 성의 없는 태도는 비난받아 마땅하지만 결과적으로 난 그 지질한 선택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형이 제안한 두 번째 안을 선택해야 했던 나는 형에게 절충안을 제시했다. 컴퓨터계열 학과 중에 내 성적에 맞는 대학을 결정하는 대신에 후보 대학을 추리고 결정하는 것은 전적으로 나에게 일임한다는 것이었다. 당시 공대의 위상은 높은 취업률로 인해 상당했는데 그중에서도 컴퓨터계열의 전산, 전산과학, 컴퓨터공학 같은 학과는 모든 대학에서 의대 다음으로 높은 커트라인을 자랑했다. 즉 중위권 대학에서도 내 성적으로 갈 수 있는 컴퓨터 전공은 흔치 않았던 것이다.


형은 내심 내 성적으로 갈 수 있는 컴퓨터 전공 학과가 있는 대학 중에 나름 업계 평판이 좋은 대학으로 나를 유도하려 했지만 전공을 떠나서 마음에 드는 대학이 잘 눈에 띄지 않았다. 형이 원하는 대학은 더더구나 싫었다. 공과대학 전통이 있는 학교이긴 했으나 학교 이미지가 그저 그랬다. 아무리 재수를 한다고 해도 그곳에는 지원하고 싶지 않았다.


당시 우리 집에서 형의 위상은 부모님의 절대적 지지를 받는 위치였다. 대학교육을 받지 못한 부모님으로서는 그럴 수밖에 없기도 하였고 나의 고등학교 8년 선배이기도 한 큰형은 이미 학교에서 전설로 통했다. 그 형을 상대하는 일은 나에게 몹시 버거운 일이었다. 결국 나는 법전보다 두꺼운 입시 설명서를 뒤지고 뒤져 원하는 대학을 찾아냈는데 정작 큰일은 여기서 발생했다.


그때까지 나는 진로에 대해 깊은 고민이 없었고 딱히 적성에 맞는 전공이나 인생 목표를 찾지 못했었다. 그런데 내가 찾아낸 대학에는 처음 접하는 전공학과가 있었고, 나는 운명처럼 단번에 그 학과에 꽂혀버린 것이다. 이런 것을 운명의 장난이라고 하는 것일까? 난 형을 설득하기 시작했는데 무관심했던 담임 선생님과는 또 다른 벽에 부딪히고야 말았다. 형은 내가 선택한 학과에 대해 아는 것이 전무했고, 나에게 그 학과가 어째서 유망한가를 설명해 주길 원했다.


세상 물정 모르는 고교생이 어떻게 그걸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겠는가? 더구나 당시의 나는 그 전공이 유망해서 좋아했던 게 아니었는데 말이다. 결국 나는 힘없이 형에게 굴복하고 당초 계획대로 컴퓨터공학과에 지원했다. 다만 당시에는 한 곳의 대학에만 지원하는 대신에 지원학과를 3지망까지 쓸 수 있었기에 내가 원했던 학과를 2지망에 넣었을 뿐이다. 1지망 학과에 불합격하면 학과별 정원의 20% 정도 선에서 2지망 학과에 선발될 수 있었다. 그때 컴공과는 커트라인이 최상위권에 속했기 때문에 1지망에 떨어져도 2지망 학과에 붙을 확률이 꽤 있었다. 난 그 한가닥 희망을 안고 1지망에서 떨어지기만 바라는 매우 수동적인 전략을 선택한 것이다.


안타깝게도 그해 대입학력고사는 수학 과목에 있어서 역대급 난이도를 자랑했다. 덕분에 대부분의 대학들이 전년대비 20점 가깝게 커트라인이 하락하였다.(당시 학력고사는 이과의 경우 320점 만점에 수학비중이 무려 75점이었다) 수학 성적이 항상 간당간당했던 나는 평소처럼 공통수학 부분에서 좋은 점수를 받았고 모르겠는 건 가볍게 찍고 넘어간 이과 수학 부분은 난이도 상향에 따른 영향을 크게 받지 않았다. 즉 평소에 받은 모의고사 점수와 비슷하거나 조금 높게 나오고 말았다. 그 결과 난 1지망 컴공과에 덜컥 합격해 버렸다.


한 번에 대입에 성공해 버리자 난 재수할 생각을 접었다. 둘째형의 고단한 재수생활을 지켜보았기 때문에 나처럼 나약한 정신상태로는 좋은 결과를 기대하기 어렵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난 못내 가지 못한 2지망 학과에 대한 미련을 접을 수 없었다. 내가 2지망 학과로 진로를 틀 수 있는 방법은 전과를 하는 것뿐이었다. 컴퓨터를 전공하니 화이트칼라가 되겠다고 좋아하시던 아버지가 내심 걸렸지만 어떻게든 설득이 될 것이라 믿었다.


문제는 학점이었다. 형의 말과는 다르게(형은 나에게 컴공과에서 수학은 못해도 된다는 사기를 쳤다) 컴공과는 1, 2학년 교양필수 과목이 수학으로 도배되어 있었고 고등학교 이과 수학에도 허덕이던 내게는 벅찬 과목일 수밖에 없는 미분 적분학, 선형 대수학, 이산수학, 전산수학, 통계학 등등이 나를 몹시도 괴롭혔다. 학사경고를 근근이 모면하는 내 학점으로는 전과는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다. 그 뒤로도 나는 컴공과 졸업 후 복수전공을 하는 방법, 대학원을 2지망 학과로 지원하는 방법 등을 다양하게 고민했으나 결국 한 가지도 실행에 옮기지 못한 채 학부 4년을 간신히 졸업하고야 말았다.


특히 2지망 학과에 대한 나의 미련은 같은 컴공과 동기는 물론 해당 2지망 학과에 재학 중이던 선배까지도 이해시키지 못했다. 취업 잘 되는 컴공과나 열심히 잘다니라는 훈수를 귀가 닳도록 들었다. 결국 나는 컴공과를 졸업했으나 석사에서는 특허법을, 박사는 IT경영학을 전공했다. 나의 첫 단추가 잘못 끼워짐으로 인해서 내가 오매불망 가고 싶었던 학과와는 영영 멀어졌고 지금은 전혀 다른 분야에서 일하고 있으나 30여 년 전 나의 잘못된 결정에 대한 미련은 여전히 마음 한구석을 채우고 있다.


당시에 내가 가족의 반대를 무릅쓰고 원하는 학과에 갔더라도 지금의 나보다 잘살고 있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지금껏 그 아쉬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단 하나다. 내가 살아오면서 처음으로 가슴이 뛸 만큼 하고 싶은 일을 만난 것이 그때였고 난 그 첫 번째 결정을 남의 손에 맡기는 바람에 평생 적성에 맞지 않은 분야에서 힘들게 공부하고 일해 왔다는 것이다.


물론 나는 대부분의 대학 동기들과 달리 소프트웨어 개발자의 길을 가지 않았다. 하지만 내 학부 전공을 바탕으로 다양한 연계전공을 찾아 학교와 전공을 바꾸면서 학위를 받았고 그에 맞게 여러 직장을 옮겨 다녔다. 그 결과는 나름대로 성과가 있었다고 생각하지만 그 과정에서 난 내내 힘에 부치고 괴로웠다. 그리고 지금은 그 짓누르는 압박감에서 벗어나고자 짧은 휴직을 하기에 이르렀다.


한 번밖에 주어지지 않는 인생에서 가슴 뛰는 일을 만나고 그것을 평생의 업으로 삼을 수 있다면 그보다 큰 행운은 없다. 내가 첫 단추를 제대로 꿰었더라도 그 일이 힘에 부쳐 다른 일을 하였을 수도 있다. 그러나 내겐 그럴 기회조차도 없었다는 사실이 나의 후회와 회한을 깊게 하는 이유다. 그 기회를 박탈한 장본인이 결국 나 자신이라는 사실이 내 마음을 더욱 쓰리게 하는 이유다. 난 치명적으로 어리석고 멍청했던 것이다.


철학자 최진석 교수가 이런 말을 했다.


“좋아하는 일을 해야 오래 할 수 있다. 무슨 일이든 오래 해야 잘할 수 있다. 무슨 일이든 잘해야 행복하다. 고로 좋아하는 일을 해야 행복한 것이다.”


이 말이 주는 울림은 그의 삶이 그의 말을 증명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의 감상,

휴직기간 내내 두 아이의 입시 준비를 지원하면서 문득문득 나의 대학입시가 떠올랐다. 그리고 한동안 잊고 있었던 잘못 꿰인 나의 첫 단추가 떠올랐다. 첫 단추를 잘못 꿰면 아래의 모든 단추가 잘못 꿰인다. 그 사람의 옷차림을 보라. 제아무리 명품 옷을 걸쳤더라도 어찌 우스꽝스럽지 않겠는가? 돌이킬 수 없는 일을 후회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다. 나는 이미 잘못 꿰인 내 첫 단추를 바로잡기보다는 하루빨리 이 옷을 벗어버리기만 바랄 뿐이다. 내가 유독 아이들의 진로에 대해서 아내와 달리 본인들의 의사를 절대적으로 지지했던 것은 끝끝내 바로 잡지 못했던 나의 첫 단추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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