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의 기적

휴직일기, -65일(2021.12.25)

by 낙산우공

종교와 무관하게 크리스마스는 지구촌 많은 이들에게 여러 가지 메시지를 선사한다. 사랑과 평화, 화해와 용서 그리고 나눔과 치유…, 그 가치는 표현의 방식이 다를 뿐 모든 종교가 지향하는 인류 공통의 보편적 가치라는 사실을 부정하는 이는 없을 것이다. 추운 겨울, 새해를 맞는 연말이라는 시기와 절묘하게 맞아떨어져 우리는 크리스마스에 고단했던 한해를 잊고 희망을 이야기한다.


온 가족이 여유롭게 모여 앉은 오늘, 아이들은 크리스마스 특선 영화를 보고 싶어 했다. 어김없이 방송에서는 해리포터와 나 홀로 집에 시리즈가 방영되고 있지만 이젠 지겨울 법도 하기에 뭔가 달달한 로맨스와 크리스마스 판타지가 곁들여진 영화를 원했다. 얼마 전 러브 액츄얼리를 보여줬을 때 아이들의 반응이 좋았기에 기대에 부응하는 영화를 찾아내기가 쉽지는 않았다. 그렇게 고심 끝에 어제는 정말 오래된 영화, 산드라 블록의 “당신이 잠든 사이에”를 소개했는데 나름 성공적이었다.(딸아이는 영화 “그래비티” 주인공 아줌마의 젊은 시절을 보는 것으로도 신기해하였다) 그래서 오늘은 크리스마스 느낌이 제대로 묻어나는 “34번가의 기적”을 보여줬다.


큰애는 어릴 때 본 기억이 드문드문 났다고 하는데 워낙 예전 일이라 처음 보듯 즐겁게 감상했다. 둘째도 외모와 달리 소녀 감성(?)이 있는 사내아이라 이틀 연속으로 나의 작품 선택에 만족해했다. 어제는 영화 말미에 남녀 주인공의 로맨스가 오글거려 못 보겠다고 방으로 들어가더니 끝날 때쯤 슬쩍 나와서 결말을 물어보고 즐거워했다. 오늘의 영화는 크리스마스와 산타클로스가 등장하니 이보다 더한 크리스마스 영화가 어디에 있겠는가?


34번가의 기적을 보신 분들은 알겠지만 기적이라는 제목과 달리 루돌프도 하늘을 나는 썰매도 나오지 않는다. 그저 자신을 산타 클로스라고 믿는 할아버지가 등장하며 그는 정말 산타 클로스라고 해도 믿길 만큼의 외모와 성품과 인상을 가졌다. 영화의 결말을 보면 그가 진짜 산타 클로스이고 주인공 가족에게 기적 같은 선물을 주고 가지만 어디에도 우리가 상상하는 판타지는 등장하지 않는다.(정확하게는 그가 진짜 산타 클로스라는 걸 보여주지 않음으로써 산타 클로스가 인류에게 보내는 메시지를 전하려 하는 이상주의자라고 해석할 여지를 남겨주기도 한다) 혹시나 하는 미련으로 엔딩 자막이 다 올라갈 때까지 기다려 보아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이 영화는 요즘엔 흔해빠진 스펙터클한 판타지 없이도 어마어마한 판타지를 관객에게 주는 진정한 판타지 영화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설픈 CG가 등장하지 않은 게 이영화의 놀라운 한 수였다고 말이다. 산타 클로스로 등장하는 리처드 아텐보로라는 배우가 이 영화의 판타지를 만들었다고 해도 좋을 만큼 탁월한 캐스팅이었다.


영화에서는 자신을 산타라고 믿는 주인공이 진짜 산타인가를 심리하는 법정에서 산타의 존재를 인정하고 주인공을 산타라고 공인해 준다. 존재를 증명할 수 없는 하느님을 믿듯이 산타의 존재도 인정해야 한다는 법관의 논리와 그래서 주인공이 산타 클로스라는 결론 사이에는 상당한 비약이 있지만 아무려면 어떤가? 오늘은 크리스마스고 우리는 판타지를 원하는데 말이다. 그래서 이 영화는 유쾌하다. 흡사 맥컬리 컬킨의 원맨쇼로 도배한 “나 홀로 집에”에 나오는 캐릭터처럼 이 영화에도 진짜 악당은 없다.


영화의 여주인공은 어린 나이에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았으나 무책임한 남편과 이혼하고 홀로 아이를 키우며 자수성가한 인물이다. 그는 삶의 무게를 감당하려다가 감정선이 메말라버렸고 남녀 간의 순수한 사랑을 믿지 않는다. 그 엄마에게서 자란 딸아이는 엄마의 영향을 받아 총명하지만 너무나 현실적이다. 엄마는 산타의 존재를 처음부터 부정하였고 아이에게 크리스마스 선물을 직접 전달해 왔다. 그래서 아이도 산타 클로스를 믿지 않았는데 영화 속 산타를 만나 생각을 바꾸게 된다.


이 대목을 보다가 한 가지 에피소드가 떠올랐다. 나는 아이들이 초등학교에 다닐 때까지는 아니 스스로 산타의 존재를 부정할 때까지는 그 환상을 깨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크리스마스 전에 아이들이 갖고 싶어 하는 선물을 알아내어 몰래 주문을 하고 크리스마스이브에 아이들이 잠든 사이에(그야말로 당신이 잠든 사이에…) 몰래 아이들 방에 갖다 놓는 일을 꽤 엄숙하게 진행했었다. 따라서 우리 아이들은 정말로 산타 할아버지가 있다고 믿었고 나는 그 환상이 언제 어떻게 깨질까를 궁금해하면서 혼자 즐거워했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 아이는 산타 할아버지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딸아이는 아빠가 산타 할아버지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동안 내 앞에서만 모른 척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아빠가 서운해할 것 같다는 걱정과 크리스마스 선물이 끊길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던 것 같다. 그 사실을 내가 알게 된 때는 딸아이가 초등학교 4학년 때쯤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사실 그 나이까지 모르고 있었다면 우리 애가 과하게 순진하거나 맹한 것일 수도 있기에 나는 크게 낙담하지 않고 그 사실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넌지시 언제쯤 눈치를 챘냐고 물었다. 그런데 아이의 대답이 나에게 충격을 주고 말았다.


아이가 산타의 부재를 알게 된 때는 무려 유치원 시절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아이에게 그 사실을 알려준 건 친구들도 선생님도 아닌 바로 내 어머니셨다.(OMG!!!) 나는 아이들의 선물을 직접 사거나 혹은 인터넷으로 주문할 때 혹시라도 아이들이 눈치챌까 걱정되어 어머니 댁으로 보냈다. 그리고 아이들이 잠든 밤에 몰래 가져다 놓은 것이다.(내 어머니는 14년 전부터 나와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사신다) 딸아이는 크리스마스가 얼마 남지 않았을 때 산타 할아버지의 선물 이야기를 신나게 하고 있었는데 할머니께서 대뜸 산타는 없다고 하셨다는 거다. 아이는 할머니와 논쟁을 벌이기 시작했는데 산타 할아버지가 있다는 증거를 대기 위해 크리스마스 선물 이야기를 꺼낸 것이다.


나는 아이들에게 산타 할아버지의 존재를 믿게 하기 위해 크리스마스 때마다 매번 따로 선물을 준비했다. 엄마 아빠가 주는 선물은 항상 아이에게 물어봐서 사주는 대신에 산타 할아버지가 주시는 선물은 아이의 일기장이나 유치원에서 쓰는 편지(산타 할아버지께 보내는) 등을 활용해서 몰래 알아내어 해주었다. 둘째는 언제나 산타와 부모의 선물을 구분하지 않고 한 달 전부터 갖고 싶은 걸 떠벌렸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준비하기가 쉬웠다.


그런데 아이와 산타의 존재로 논쟁을 시작하신 내 어머니는 크리스마스 때마다 진행된 내 007 작전의 전모를 아주 소상하게 까발려 버리셨다고 한다. 당신의 집에 선물을 숨겨 놓은 것까지… 당시 아이의 표현을 빌리면 망치로 한 대 맞은 것 같은 충격이었단다. 아이의 말을 들었을 때 나도 비슷한 상태였다. 내가 왜 그렇게 그 일에 공을 들였는지 내 어머니는 진정 모르셨을까? 교회에 다니시고 성탄절 찬양예배를 전야제 포함해서 평생 거르시지 않는 내 어머니는 주 예수 그리스도는 철썩 같이 믿으셨지만 성 니클라우스 신부의 전설 따위는 거들떠보지도 않으셨다. 물론 내 세대에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아 본 이가 몇이나 되겠는가…


이렇게 나의 장대한 산타 클로스 위장술은 아주 싸늘하게 그 막을 내렸다. 오늘 영화를 보며 문득 들었던 생각은 주인공 여자아이에게 산타 클로스의 존재를 처음부터 부정했던 엄마와 손주의 판타지를 산산조각 내신 내 어머니 중에 누가 더 매정한 사람일까? 갑자기 궁금해졌다.




오늘의 감상,

나의 산타 클로스 대작전 중 클라이맥스는 2009년 크리스마스이브였다. 유난히 일에 치였던 그 해 나는 12월 중순까지 새벽 2시에 퇴근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아이들을 자주 못 본다는 아쉬움과 미안함이 교차했던 그때 난 일생일대의 전무후무한 이벤트를 진행했다. 바로 산타 복장 9종 세트(눈썹까지 하얀)를 구매해서 아이들 앞에 깜짝 등장한 것이다. 나를 본 아들 녀석은 공포에 떨었고 딸아이는 대번에 나를 알아봤다. 큰애가 놀라지 않고 나를 금세 알아본 이유는 할머니의 속 깊은 배려(?) 덕분이었던 것이다. 단 한 번의 이벤트 후 12년 동안 옷장 속에 잠자고 있는 이것을 어떻게든 처분해야겠다는 생각이 오늘에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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