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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낙산우공 Dec 22. 2021

태권도의 추억

아들의 태권도 수련(2013. 3.11)

당당한 체격의 서양 사람들은 의외로 겁이 많다고 한다. 특히 동양 무술에 대한 환상이 있어서 이소룡 출현 이래로 중국인은 쿵후, 일본인은 가라데 그리고 한국인은 모두 태권도 유단자라고 생각해 기본자세만 취해도 지레 겁을 먹는다는 우스갯소리를 듣는다. 직접 경험해 보지 않았으니 확인하진 못했지만 은근히 우월감을 느끼게 하는 대목이다. 사실 군대에 가면 태권도 단증을 의무적으로 따야 하니 전혀 근거 없는 이야기도 아니다. 나는 공군을 나온 탓에 훈련소에서 태권 3장만 마스터하고 5급 자격증을 취득한 게 고작이지만 말이다.

 

그런 이유인지는 모르나 사교육이 창궐하기 한참 전인 70년대에도 태권도 도장은 초등학생 남자아이들에게 필수코스 중 하나였다. 흰띠, 파란 띠, 빨간 띠, 검은띠는 군대 계급장을 능가하는 '짬밥'의 상징이었고 굳이 추운 겨울에도 맨발에 도복을 입고 동네를 누비던 아이들을 종종 발견하곤 했다. 당시에는 씩씩하고 용감한 것이 남성성을 대표하는 이미지였기에 사내아이라면 열일 제쳐두고 제 몸을 지키고 나아가 배우자와 가족을 보호할 수 있는 격투기를 한두 가지 익히려 한 것이겠다. 우리 사회 깊숙이 침투해 있던 싸구려 군대문화의 잔재도 일정 부분 기여하였겠지만.

 

타고나기를 허약했던 탓인지 나는 지금껏 과격한 운동이나 울퉁불퉁한 근육을 그다지 부러워하지 않지만 완력으로 동무들을 제압하는 어설픈 유단자가 많았던 학창 시절엔 유난히 곤혹스러운 경우를 많이 당하곤 했다. 내 왜소한 체구가 그들의 자신감을 부추겼다는 것을 알기에 그것은 참을 수 없는 모욕감이었다. 어려서 간디의 전기와 자서전을 탐독한 탓이라고 믿고 싶지만 난 야비한 폭력에 대체로 무저항으로 대응했던 것 같다. 가끔은 호전적 시선을 피해야 하는 스스로가 비굴하다고 느껴질 때도 있었지만, 어떻게든 무대응의 논리를 세우려고 노력했던 기억이 남아있다. 내 행동이 단순히 무서웠기 때문이라고 인정하기에는 피 끓는 사춘기가 그 사실을 용납할 수 없었다.

 

'말죽거리 잔혹사'의 클라이맥스를 기억하는가? 교내에서 소심하고 존재감 없던 권상우가 몸짱으로 다시 태어나 부당한 권력의 상징인 '일진 짱'과 옥상에서 맞짱을 뜨는 장면이 나온다. 비겁하게 등 뒤에서 쌍절곤으로 먼저 공격하긴 했지만, 동네 막싸움의 재현에 있어서 만큼은 '품행제로' 다음으로 최고의 '레알(사실감)'을 뽐내던 이 영화에서 유난히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사람들은 대부분 나와 같은 학창 시절을 보낸 이들이리라. 이 영화는 꽤 대중적인 코드로 무장하고 있지만 암울한 시대적 배경을 실감 나게 바닥에 깔고 있어서 혀 짧은 권상우의 발음과 몸짱 프로젝트라는 자극적인 설정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못지않은 시대정신으로 다가온다. 적어도 나에게는.

 

지난해, 아빠를 닮지 않아 또래에 비해 큰 덩치를 자랑함에도 불구하고 아빠를 닮아 소심하고 예민한 탓에 과격한 친구들의 힘자랑에 늘 꽁무니를 빼는 둘째를 큰맘 먹고 태권도 학원에 보냈다. 남자 형제가 없는 탓인지 사촌 형들만 보면 속칭 '꼬붕(?)'을 자처하며 제 형들이 원치도 않는 '대장님'을 남발하는 것을 보며 이게 왠 '똘마니' 근성인가 했는데, 아마도 지구촌 수컷들(?)이 겪는 일반적인 통과의례라고 여기는 것이 맞겠다 싶기도 해서 마음껏 그 기분을 즐겨보라고 태권도를 가르쳤다. 상담하러 간 첫날은 잔뜩 긴장해서 관장님과 눈도 마주치지 못하던 녀석은 몇 달이 지난 지금 아주 신이 나 있다. 참고로 요즘 태권도 학원은 흰띠, 흰 줄띠, 노란띠, 노란 줄 띠 등 품계를 세분화해서 아이들에게 으쓱한 진급 날을 꽤 자주 선사한다.

 

자고로 완장과 계급이란 남자들에게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인 것 같다. 팜므파탈처럼... 유치원에서 배운 인사예절도 소용없던 둘째는 첫날부터 배꼽인사를 거창하게 한다. 과격한 공격과 수비가 난무하는 무술의 특성상 예절교육은 필수적이라 하겠으나, 학원 간판마다 출신학교나 국가대표 경력이 나붙어야 살아남는 경쟁사회에서는 조금 과잉의 냄새가 난다. 퇴근하다가 우연히 태권도 학원 차량에서 내리는 아이들을 보았는데, 저마다 공손히 배꼽에 손을 얹고 관장님께 이렇게 인사를 한다. '관장님 감사합니다. 효도하겠습니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관장님 덕분에 아이들에게 효도받는 세상에 살게 되었다.

 

'독도는 우리 땅'은 단순한 멜로디와 의미심장한 가사로 인해 국민가요가 된 지 오래지만, 그 덕에 응원가로 홍보송으로 다양하게 개사되고 활용된다. 우리 아이가 요즘 심각한 중독상태에 빠진 태권도 학원 홍보송이 그 대표적인 예라 하겠다. 나 역시 몇 번 듣고는 가사를 외워 버렸으니 말이다.

 

1절 : XX구 XX 천 뱃길 따라오면은 재밌기로 소문난 OO태권도, 쿵후는 중국 꺼, 유도는 몰라도(?), 태권도는 우리 꺼. 우리 꺼!

2절 : 잘생긴(?) 관장님, 귀요미 사범님, 깜찍이(?) 선생님 우리 사랑해. 관장님 때문에 태권도가 좋아요. 태권도는 OO다. OO다!

 

학원 상호를 밝힐 순 없지만 관장님의 탁월한 영업마인드가 놀랍다. '쿵후는 중국 꺼, 유도는  몰라도'란 가사는 원곡의 주제의식을 고스란히 존중하고 있다. 우리 아이는 이 노래를 그 어떤 노래보다 진지하게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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