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 빠짐 주의

휴직일기, -17일(2022. 2.11)

by 낙산우공

2003년 말 생애 첫 해외 출장지로 가게 된 영국은 생경하고 낯설면서 한편으로는 신비로운 곳이었다. 사진이나 영상을 통해서만 접했던 광경이 눈앞에 펼쳐지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놀라웠다. 런던 외곽의 주택가에 숙소를 잡았던 우리는 동화 같은 그 마을이 실재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웠고, 영화 트루먼쇼에 나오는 오픈세트장이 아닐까 의심이 들만큼 나는 지독하게 촌놈이었다.


그 뒤로 몇 차례 더 해외출장을 다녀보고 또 아이들과 함께 가끔씩 해외여행을 다니게 되면서 이젠 웬만한 광경에는 경이로움을 느끼지 않을 만큼 되었지만, 지금 되돌아보더라도 그때의 문화충격은 강렬했다. 그렇게 15년이 넘어 가족들과 함께 다시 찾았던 영국 또한 예전 같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좋았다. 한때 세계를 제패했던 제국의 흔적이 남아 낡고 초라해진 모습들도 기품이 있어 보였는지 모르겠다.


각설하고, 나의 첫 영국 방문에서 오래 기억에 남았던 것 중 하나는 런던의 지하철이었다. 역사가 깊은 시설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영국인들의 체격과는 어울리지 않게 작고 깜찍한 열차의 크기와 터널 모양처럼 둥근 지붕이 인상적이었다. 그중에서도 역에 도착할 때마다 나오는 안내방송에서 반복적으로 나오는 멘트 “Mind the gap”은 꽤 중독성이 강했다. 열차와 승강장 사이가 벌어져 있으니 타고 내릴 때 발이 빠지지 않도록 주의하라는 안내였다.


억양을 달리 하면서 짧은 세 단어를 반복적으로 방송하기 때문에 지하철을 타고 다닐 때마다 지나칠 수 없는 그 멘트에 지속적으로 노출된 것이다. 그런데 똑같은 안내 멘트가 서울 지하철에서는 이렇게 방송된다. “이 역은 승강장과 열차 사이가 넓으므로 내리고 타실 때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런던과 서울의 지하철은 노선도가 비슷하다. 런던의 지하철 노선을 참고해서 서울 지하철을 설계했다고는 하나 노선의 구조와 라인의 색깔까지 비슷해서 처음 노선도를 보았을 때는 많이 놀랐다. 그런데 승강장과 열차의 안내 방송은 너무나 달랐다. 말 그대로 Gap을 연상할 수밖에 없을 만큼 한쪽은 간결하였고 한쪽은 지나치게 구체적이었다. 어떤 측면에서 보면 그것이 단지 언어의 차이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단언컨대, 영어를 잘하지 못하지만 우리말과 영어는 서로 직역을 했을 때 어색한 표현이 많다. 언어습관의 차이와 문화적 이질감도 큰 이유가 될 것이다. 예를 들어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던 사람들끼리 출입문이 열렸을 때 서로 양보하는 경우를 생각해 보자. 우리는 당연히 “먼저 타세요”라고 말한다. 그런데 영어식 표현은 “You go first”가 아니라 “After you”다. 상대가 어이없거나 황당한 이야기나 요구를 했을 때 우리는 “장난하니?” 혹은 “미쳤니?” 또는 “뭔 헛(개) 소리야”라고 하는데 영어로는 “Are you serious?”다.


그 어감의 차이를 내가 이해하고 소화할 수는 없다. 그러나 런던에서 “Mind thep gap”을 처음 들었을 때 간결하고 의미 전달이 깔끔하다는 좋은 인상을 받았고 우리의 안내멘트는 너무 이용자 친화적이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서울의 안내방송은 장황하고 길었지만 무심코 흘려들으면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그런 생각을 꽤 오래전에 하고 잊었는데 오랜만에 지하철을 이용하다가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서울 지하철의 안내 멘트가 바뀌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놀랍게도 런던 지하철과 흡사하게 “발 빠짐 주의”라는 안내가 반복적으로 흘러나오고 있었다. 승강장과 열차 사이가 넓으니 조심하라는 똑같은 이야기를 이렇게 간결하게 줄이게 된 배경이 궁금해졌다. 그리고 이 간단한 표현이 불친절하다고 느끼거나 무슨 의미인지 짐작하지 못하는 이들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열차와 승강장 사이에 발이 끼인다는 건 상상하기조차 싫을 만큼 끔찍한 일이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안내방송을 들었다고 하여 바닥을 보면서 열차를 타고 내리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하는 의구심도 있다. 정작 발 빠짐 사고는 안내방송과는 무관하게 발생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내방송을 생략한다면 모든 발 빠짐 사고의 책임을 지하철 공사가 떠안을 것이다. 그렇게 면피용 안내방송이더라도 최소한 승객이 방송을 인지하는데 좀 더 효과적인 멘트를 고민하고 있는 것 같아 반가운 마음도 들었다.


아무튼 서울의 새로운 안내방송을 들으면서 2003년의 런던 지하철이 떠올랐고 그때의 안내방송이 아내로부터 부여받았던 또 다른 미션을 상기시켰던 기억이 났다. GAP이라는 패션 브랜드는 당시에 우리나라에서는 흔하지 않았다. 아내는 연말 크리스마스 세일이 한창일 테니 영국에 가면 꼭 GAP 의류매장에 들러 옷을 사 오라고 당부한 것이다. 그런데 런던에서 지하철을 탈 때마다 나의 미션을 환기시키는 듯한 안내방송을 들었고 덕분에 난 무난히 임무를 완수할 수 있었다. 이제는 서울 어디에서든 살 수 있는 흔한 브랜드이지만 말이다.


이렇게 일상 속에서 마주치는 다양한 상황 중에 그것이 누군가에게는 새로운 의미로 전달되는 일들이 종종 있다. 2003년 런던 지하철의 “Mind the gap”은 내게 아내의 미션을 연상시키는 역할을 톡톡이 했다. 그리고 2022년 서울 지하철의 “발 빠짐 주의”는 내게 또 다른 의미로 다가오고 있다. 어딘가 벌어진 틈 사이로 발이 빠지는 일을 주의해야 할 만큼 오늘의 나는 모든 게 조심스럽기 때문이다.


열 달의 휴가를 마치고 복귀를 앞두고 있는 지금, 인사명령을 기다리는 초조함과 어디로 배치될지 모르는 궁금증 사이 어딘가에 나는 서 있다. 그곳이 익숙한지 혹은 생소한지 여부를 떠나 이제는 낯설어진 삶의 패턴에 다시 적응해야 한다. 그리고 지난 열 달의 시간이 헛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해야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최소한 휴직 전과 다름없는 내 업무능력을 회복해야 한다. 그저 한 살을 더 먹은 오십 대의 노땅 취급만큼은 받지 않아야 한다. 돌다리도 두드려 보고 건너는 마음으로 벌어진 좁은 틈에 발이 빠지는 황당한 상황마저도 조심해야 하는 극도로 예민한 시기에 돌입하는 것이다.


쉬어 보이는 일도 오랜만에 다시 하게 되면 긴장되기 마련이다. 하물며 나는 기껍게 즐거운 마음으로 돌아가는 길이 아니다. 마음이 무거운 건 내 의지로 어찌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당하게 발이 빠지는 실수는 범하지 않아야겠기에 서울의 지하철은 나에게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라고 이렇게 환기해 주는 것이다.


“발 빠짐 주의, 발 빠짐 주의, 발 빠짐 주의”




오늘의 감상,

코로나19에 또 이런저런 핑계로 2년 넘게 소원했던 고교 동창들을 오랜만에 만났다. 강남역으로 향하는 지하철에서 안내방송을 들으며 이런저런 상념에 사로잡혔던 나는 예전보다는 한가한 강남역 한 주점에서 거나하게 술에 취해 화장실에 들렀다. 오십이란 내 나이가 어색할 만큼 주변에는 온통 젊은 친구들이었는데 용변을 보면서 우연찮게 들은 이야기에 웃음이 났다. 기껏해야 대학생으로 보이는 몇몇의 남자아이들이 화장실에 모여 그날의 만남을 복기하고 있었다. 알고 보니 단체미팅을 했던 것 같은데 한 학생이 상대가 우리를 썩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지는 않다는 의견을 공유하면서 오늘 술값은 우리가 나눠서 내자는 제안을 하고 있었다. 내가 어울리지 않는 공간에 끼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 아이들의 순박한 대화가 너무 귀여워 순간 술값을 내주고 싶은 충동까지 느꼈다. 어설프게 여자 파트너에 대한 품평이나 해댔으면 불쾌했을 법도 한데 그 아이들의 조심스러운 말투가 귀엽고 반가웠다. 그래 요즘 애들이라고 다 까진 건 아닌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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