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수 밤바다

휴직일기, -9일(2022. 2.19)

by 낙산우공

아이들의 졸업식을 무사히 마치고 불과 열흘 남짓 복직을 앞둔 채 마지막 가족여행을 감행했다. 9년 전 남해안 일주 여행에서 스치듯 지나갔던 여수를 제대로 다시 보겠다는 생각으로 감행한 2박 3일 여수행은 왕복 8백 킬로미터에 육박하는 자동차 운전이었지만 생각보다 피로감이 덜했다.


내 머릿속을 가득 매운 여러 상념들이 체력 따위는 한 순간에 잊게 해 준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런데 여수는 생각보다 평범했다. 첫날 숙소에 짐을 풀고 여수 야경을 보러 나갔을 때만 해도 나와 가족들은 꽤나 흥분 상태였다. 갑작스러운 한파에 손이 떨어져 나갈 듯 추웠지만 아이와 나는 휴대폰 카메라를 놓지 않았다. 스케일은 다르지만 흡사 샌프란시스코 금문교를 바라보는 감상으로 나는 돌산대교를 바라보았다.


이튿날 여수 낮바다는 평범한 항구, 어촌마을로 돌아와 있었다. 한때 관광객이 물밀 듯 밀려왔다는 엑스포의 흔적은 별로 남아있지 않았다. 이곳도 곧 대전의 엑스포 과학공원 같이 을씨년스러운 장소가 되지 않을까 염려스러울 만큼 말이다. 전라좌수영 앞 거북선에는 수백 마리 비둘기 떼가 자리를 잡고 있어 접근할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덕분에 우리 집 호두(반려견)는 한적한 종포 해양공원을 마음껏 달려보는 호사를 누렸지만 사실 이걸 하러 온건 아닌데 하는 아쉬움이 없지 않았다. 여수 여행의 하이라이트는 만석리 검은 모래 해변이었다. 인터넷을 열심히 검색해서 찾았던 이곳은 정녕코 관광지라는 표현이 무색한 곳이다. 젊은 친구들 몇몇이 방문하자마자 당황해서 서둘러 떠나는 모습을 목격했다.


우리도 부랴부랴 자리를 뜨고 일찌감치 숙소에 돌아와 바비큐 파티를 즐겼다. 숙소 앞은 호수인지 바다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여수만의 바다가 잔잔히 흐르고 있었고 그 아름다운 전망을 바라보며 삼겹살에 와인 한잔을 곁들이는 호사를 누렸다. 그제야 나는 안심할 수 있었다. 아, 맞아… 여행은 이런 거지… 4백 킬로미터를 달려왔지만 그 노고가 하나도 아깝지 않았다.


집보다 조금 불편하고 생각보다 대단한 것이 없는 게 원래 여행이다. 그럼에도 이 여행이 훌륭한 시간을 제공해 준 건 온 가족이 4시간 넘게 같은 차 안에서 시간을 보냈고 고속도로 휴게소 가락국수 한 그릇에도 웃음꽃을 피웠고 그리고 낯선 풍광들이 우리에게 다른 시선을 만들어 준 것… 그것만으로 여행은 충분히 제 몫을 다한 것이다. 게다가 기가막힌 여수 밤바다까지 즐겼으니 더 바랄 것이 무엇이겠는가…


숙소가 낯선 탓인지 변비 기미가 보이던 호두는 마지막 날 아침에 시원하게 변을 보았다. 이게 과연 3.4 킬로그램 나가는 소형견의 것일까 의구심이 들 만큼 “빅 똥”을 남긴 것을 보고 아이들은 기겁을 했지만 우린 하루 종일 이 이야기로 웃었다.


반려견의 변을 보고도 웃을 수 있는, 그런 기막힌 여행을 다녀왔다. 아이들의 입학과 나의 복직을 열흘 앞두고…




오늘의 감상,

복직 인사명령의 결과가 궁금하였던 차에 여행 중에 반갑지 않은 연락을 받았다. 우여곡절 끝에 나는 휴직 전 부서로 다시 복귀해야 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의 휴직은 아이들을 위한 선택이면서 나를 위한 도피였기 때문에 결과가 실망스러웠던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이 결과가 나의 도피행각을 스스로 마무리하라는 계시처럼 느껴지기도 하였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는 말을 싫어하지만 “즐길 수 없으면 피하라”는 말을 더 싫어하기에 나는 부딪치기로 하였다. 피할 수 없으면 방법은 정면돌파밖에 없는 것이다. 결자해지의 마음으로 나는 현실과 마주할 것이다.


지난 한 달을 돌아보니 신년운세나 보면서 불안감을 추스르던 오십한살의 지질했던 자화상이 떠올랐다. 인간은 늘 불리할 때 아이가 되지만 마지막에는 어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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