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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낙산우공 Feb 28. 2022

원칙과 상식

기준이 실종된 사회(2018. 9.11)

원칙과 상식이 통하는 사회를 외치면서 한편으로 가장 철저하게 그 외침을 외면하였던 한 전직 대통령의 말년을 목도하지 않았더라도, 우리 사회에 만연한 편법과 변칙은 뿌리가 깊다. 발 빠른 2등 전략이라는 기치 아래 생존과 추격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의 정당성은 중요하지 않았던 산업화의 그늘이라 치부하기에는 우리 모두 그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곳간에서 인심이 나듯 풍요의 청소년기를 거친 우리 세대에겐 하루 세 끼 끼니를 걱정하던 시절의 절실함을 비난할 자격이 없다. 그 절박함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과거의 잘못을 지적하는 것보다는 무엇이 바뀌어야 하는가를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앞선 전직 대통령의 사례가 아니더라도 나는 원칙과 상식이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원칙과 상식은 우리의 가치판단과 행동 규범을 규율하는 잣대로서 부족한 면이 있기 때문이다. 이 말에는 원칙과 상식의 실체를 규명할 기준이 제시되어 있지 못하다. 이 말에는 자신의 행동이 원칙과 상식에서 어긋나지 않았다는 항변을 배척할 힘이 부족하다.


모든 원칙에는 그 원칙을 세우는 근거가, 기준이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원칙이라는 말, 원칙주의자라는 말에는 어떤 기준에 따라 원칙을 세웠고 그것을 고수하는 것인지 확인할 방법이 없다. 따라서 그저 나는 원칙에 따랐을 뿐이라는 항변을 기각할 명분이 취약하다. 또한 상식이란 행동기준은 될지언정 가치판단의 기준은 될 수 없다. 우리는 상식적으로 행동할 의무는 있지만 세상의 복잡다단한 상황들은 상식으로 결정하지 못할 것들이 수두룩하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진정한 원칙주의자란 원칙을 고수하는 자가 아니라 스스로의 신념에 따라 원칙을 세우고 그것을 지키는 자들이다. 나의 결정과 행동을 누군가 주시하든지 그렇지 않건 간에 관계없이 매사에 자신의 신념에 맞는 기준을 갖고 판단하면서 행동하는 자가 진정한 원칙주의자라는 말이다. 누구나 자신의 삶을 지배하는 가치와 철학이 있다. 그 가치와 철학에는 자기만의 이유와 논리가 있다. 그것이 제대로 형성되지 않은 이에게 원칙을 운운하는 것은 가당치도 않다.


자신만의 가치관과 철학은 굳이 고고한 학문적 이론에 기초할 필요가 없다. 그저 자기만의 살아가는 목적이 있으면 된다. 그 목적이 무엇이건 간에 공동체의 질서와 이익을 해치지만 않으면 된다. 누군가 자유는 자기 이유의 준말이라고 했던가. 누구나 삶의 목적은 존재했지만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과 방법은 존재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저마다의 가치와 철학은 합리적이고 공감할 수 있는 원칙을 세우지 못했던 것이다. 그렇게 원칙주의자가 없는 세상에서 우린 원칙과 상식을 입으로만 떠들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삶을 영위하는 과정에서 부딪히는 다양한 사건과 현상 속에서 나만의 원칙을 지키려고 노력한다. 내 원칙을 세우는 가장 중요한 기준은 양심이다. 스스로의 양심에 비추어 지켜야 할 원칙을 만들고, 그 원칙을 고수하기 위해 세상과 소통하는 행동방식은 상식에 기초한다. 인류 문명이 태동한 이래 우리의 행동양태는 다수가 공감하는 정상적인 형태로 정형화되었으며, 그런 다수에 의해 채택된 방식이 바로 상식이다. 고로 나는 내 원칙을 고수하기 위해 타인에게 상식적인 선에서 행동해야 한다. 그것이 타인의 오해와 비난으로부터 나를 지킬 수 있는 수단이기 때문이다.


장황하고 어설픈 내 주장의 결론은 이것이다. 원칙은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예측불허의 상황에서 나의 결정을 좌우하는 좌표로서 존재해야 하며, 그 원칙을 드러내는 방식은 타인이 공감할 수 있는 상식적인 형태로 나타나야 한다는 것이다. 즉 우리는 공공의 선을 위해 원칙에 따라 상식적으로 행동해야 할 의무가 있지만, 그 이전에 스스로의 가치와 철학에 맞는 자신만의 원칙을 세워야 한다는 것이다. 원칙과 상식은 가치 기준이 아니다. 그것은 행위 기준일 뿐이다. 나만의 가치 실현을 위해 우린 원칙과 상식을 활용할 뿐이다. 원칙과 상식이 실종된 것이 아니다. 원칙을 스스로 세우는 일이 증발한 것이다.


세상이 만들어 준 원칙이란 없다. 법과 윤리는 우리의 행동을 통제하기 위한 상식일 뿐이다. 원칙이 없는데 그것을 지키라니, 참으로 이상한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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