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를 벤다고 눈을 감을 순 없다(2012.10.15)
눈 감으면 코 베어 가는 각박한 서울 인심을 한술 더 떠 비아냥대려고 결성한 밴드가 '눈뜨고 코베인'이다. 물론 내 추측(그냥 커트 코베인을 오마주한 것인지도…). 한양에 한번 가려면 괴나리봇짐에 짚신 너덧개는 꼬아매고 다니던 조선시대에도 서울 인심이 그러하였는데, 가히 광속의 변화에 비유되는 오늘의 서울이 눈뜨고 있다고 코 따위를 베지 못할 리 있겠는가.
강원도에서 군대생활을 경험한 서울 출신들이 귀가 따갑도록 듣는 말은 '서울내기 다마내기', 뜻도 모를 이 빈정거림을 이해하지 못한 서울내기는 아마도 없었으리라. 서울 하늘 아래에서 아침 7시~8시 사이에 출근을 하고 저녁 8시를 넘어 알코올의 세계에 풍덩 빠지는 직장인들은 날마다 눈뜨고 코베일 각오를 하고 산다.
도무지 배려라고는 엊그제 말아 드신 김치말이 국수나 콩나물국밥에 빠뜨렸는지 그 인색함이 칼에 베일만큼 섬뜩한 세상에 살려면 눈뜨고 코베이는 것쯤이야 대수롭지 않게 넘기고 살아야 할 일이다. 놀라운 의학기술의 발전은 베인 코는 물론이고 없는 코도 만들어주지 않던가. 그렇게 경제적 풍요는 갈수록 황폐해지고 비정해지는 인간관계를 복원하는 예술의 경지에 이르렀지만, 아무리 비꼬아 보아도 헛헛한 마음을 달랠 방법을 진정 난 모르겠다.
세상의 모든 비틀어지고 원형을 잊어버린 현상에 휩쓸리면서 두 가지는 지키고 살자고 다짐하여 왔다. 형식적인 포장보다는 실질적인 내용에 가치를 두고, 실리적인 계산보다는 정당한 명분을 쫓아가자는, 21세기엔 폐기 처분되고 만 나의 가치관은 요즈음에 이르러 근간이 흔들리는 혼란을 일으키고 있다.
형식적인 것과 실질적인 것, 명분이 있는 것과 실리만 있는 것은 대비되는 개념이 분명하지만, 난 이들을 인과관계로 묶는 오류를 범한 것이다. 이를 테면, 형식에 치우친 업무처리는 내재된 리소스를 최소한으로 소비하되 실리를 잃지 않으려는 잔머리에서 나온 행동양태다. 즉, 실리를 챙기되 손해를 보지 않으려는 의도에서 우린 적당히 대충 티 나지 않게 포장하는 기술을 터득한다.
반대로 먼저 타당한 명분이 있는지를 판단하고 그에 따라 실질적인 성과물을 만들어 내려는 노력은 사안에 접근하는 아주 근본적인 태도의 문제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명분이 있는 일이라면 개인적인 유불리를 떠나 실질에 접근하려는 열정을 보이자는 것. 명분이 없는 일에 덤벼들지 못하고, 형식적인 포장에 애정을 쏟지 못하는 이유는 너무도 당연했다.
13년 차 직장인의 눈에 이제야 보이는 것은 실리적인 명분이고 형식적인 실질이다. 명분은 실질에 닿아있고, 실리는 형식적인 행위의 이유라고 생각하였는데, 사실은 명분과 실질은 존재하지 않는 개념이었다. 내가 기대하는 정당성과 실체성을 대변하는 명분과 실질이란 말이다.
명분이라는 단어는 이권에만 몰두한 추악한 속내를 감추기 위해 만들어진 개념이고, 실질이란 말은 사실 형식적이라는 비난을 포장하기 위한 수사에 불과했던 것이다. 우리는 조작적 개념에 놀아난 것이다. 배웠다면서...
이제껏 나의 방황이 그럴듯한 명분을 찾으려는 시행착오와 실체에 다가가려는 몸부림이었다고 우겨대던 내게 더 이상은 부정할 수 없는 세상의 현실과 추악한 진실을 마주한 기분이란. 고작 원점에 돌아오기 위해 나는 마흔 해를 힘들게 뱅뱅 돌고 돌았던 것이다. 그토록 알 수 없던 무기력의 근원은 적나라한 현실인식이 무의식의 세계에서 나마 잠재되어 있었기 때문인지 모른다.
그것을 인정하며 또 마흔 해를 살아가자니 발 디디고 설 힘조차 사치스럽다. 눈뜨고 코라도 베여야 견딜 수 있는 날이다.
십 년 전의 이 글을 읽고 있노라면 두 가지가 떠오른다. 그새 나는 많이 늙었으나 삶이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이고, 그때 난 많이 젊은 탓에 혈기왕성했다는 사실이다. 어쨌든 난 십 년을 버텼고 이제 그만큼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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