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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낙산우공 Sep 15. 2022

불청객

지렁이처럼 꿈틀거리다

지렁이는 평생 땅속을 숨어 다니거나 땅 위를 기어 다닌다. 가진 건 몸뚱이 하나 뿐으로 팔도, 다리도, 하다 못해 짧은 갈퀴 하나도 튀어나오지 못한 채 기다란 소화기관으로 채워진 일자 몸이다. 생물의 탄생 이후 소위 고등동물이 되기까지 정교한 신경전달체계와 다양한 기능의 기관들이 속속 등장했지만 지렁이는 참으로 단조롭다.


그런 퇴행적이고 열등한 생물의 대명사라고 할 수 있는 지렁이와 관련한 속담이 있으니 바로,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 한다"

이 속담을 모르는 이는 없을 것이다.


하물며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거리는데 인간이야 오죽하겠는가? 보통의 인간은 밟히기 전에 상대를 때려눕히거나 그 자리를 피할 것이다. 어지간히 어리석거나 못난 인간이 아니라면 말이다. 난 평생을 기어 다녔다. 벌떡 몸을 일으켜 세울 번듯하고 튼튼한 다리도 없었고, 물속을 자유롭게 헤엄칠 아가미도 없었으며, 돌고래 같은 탁월한 잠수기술도 없었다. 그래서 기어 다녔다. 누군가의 눈에는 하찮고 또 누군가에게는 애처롭고, 또 누군가에게는 보이지도 않았겠지만 난 묵묵히 기어 다녔다. 남보기 부끄러울 때는 얼굴이 빨개졌지만 가진 재주라고는 기어 다니는 것뿐이기에 열심히 그랬다.


그런 내가 참을 수 없는 일이 단 한 가지 있으니 그게 바로 밟히는 일이다.


그래서 나는 꿈틀댄다. 온몸이 꿈틀거린다. 그런데 주먹이 나가거나 험한 욕이 나오진 않는다. 그저 온몸과 마음이 미친 듯이 꿈틀댔다. 내 몸이 꿈틀대는 건 밟혔다는 증거다. 지렁이도 밟히면 가만히 있지 않는 법인데 하물며 인간이 어떻게 밟히고 나서 그저 꿈틀대기만 할 것인가.


나는 온몸이 꿈틀대던 순간에는 분명하게 밟혔다는 것을 인지하였고, 내가 할 수 있는 저항을 하였다. 아주 차분하지만 용의주도하게 밟은 이를 공격하였다. 그리고 더 이상 나를 밟을 수 없도록 그곳을 떠났다. 그렇게 나는 다섯 번 밟혔고 여섯 번 일어났다. 한심하게도 나는 밟힐 때만 일어난다. 사람들은 내가 밟혔다는 사실을 잘 모르거나 인정하지 않았다. 무슨 그런 일로 그렇게까지 대응을 하느냐고 타박을 하는 이에게 가끔 수긍하고 싶을 때가 있지만 난 그럴 수 없었다. 난 분명히 밟혔기 때문이다. 그 증거는 내 몸의 꿈틀거림이다. 나는 전생에 지렁이었는지 몰라도 현재도 지렁이처럼 기어 다니기 때문에 밟혔을 때만 꿈틀거린다.


그런데 요즘은 밟히지 않아도 꿈틀댄다. 평생을 불청객으로 여섯 곳의 직장을 전전하면서 나의 꿈틀거림은 이제 마그네슘 부족으로 일어나는 눈밑 경련처럼 되었다. 내가 어디엔가 정착하려 했을 때 언제나 나보다 한발 먼저 그곳에 안주하고 있던 이들은 나를 불청객 보듯 하였다. 그런데 이제야 내가 알게 된 것이 있으니 불청객은 주인이 초대하지 않은 손님이란 뜻이다. 다시 말해 나를 불청객으로 정의 내릴 수 있는 자는 주인이어야 한다는 것인데, 나를 불청객 취급한 모든 이들은 나와 같은 객이었다. '주객이 전도되었다'는 말은 이럴 때 하는 것이다.


불후의 명곡, '인생은 나그네 길'을 들먹이지 않아도 우리 모두는 객이다. 객들끼리 싸우는 이유는 뻔하다. 주인이 제아무리 인심이 좋다한들 모든 객에게 넘치도록 베풀리는 없을 터... 제 몫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먼저 온 객은 나중에 온 객을 밀친다. 그래서 나는 더럽고 치사하다고 하면서 다섯 번을 밀려 주었다. 이제 밀릴 곳이 없으니 나는 밟히지 않았다고 우긴다. 밟혔다는 사실을 도저히 부정할 수 없을 때는 그들이 주인이 아니라고 우긴다. 그렇게 나는 끝까지 살아남을 것이다. 온몸이 꿈틀대더라도 마그네슘 보충제로 연명하면서 말이다.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살아 남은 자가 강한 것이라 했던가? 적자생존의 정글이 되어버린 조직에서는 무슨 논리든지 통한다.


* Image from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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