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ento mori 6
처 외조모라고 하면 뭔가 복잡하면서도 멀리 있는 존재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쉽게 말해 내 아내의 외할머니다. 외가와 유독 가까운 집들이 많기에 외할머니는 친할머니와 달리 각별한 경우가 많다. 내 아내는 그 각별함이 더 유난스러운 경우다. 아내는 태어나자마자 외할머니 손에서 자랐다. 교직에 몸담고 계시던 장모님은 친정에서 먼 인천 학교에 재직하셨기 때문에 친정의 육아 도움을 받기 어려우셨고, 별 수 없이 친정엄마에게 아이를 맡긴 채 방학에만 아내를 데려왔다고 한다. 내가 절대 동의하지 않는 육아방식이지만 그분들 세대에서는 별 대수롭지 않은 일이기도 하였다.
아내는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 손에서 초등학교에 진학하기 전까지 길러졌고, 입학한 후에는 교사인 처이모님과 경기도 외지의 학교를 전전하며 6학년이 될 때까지 살았다.(독신으로 발령지를 돌아다녀야 하는 이모님께서 아내를 동거인으로 선택한 것이다) 아내의 말을 빌리면 방학 때 집에 가 있는 게 너무 괴로웠다고 한다. 그녀에겐 외가가 집이었고 엄마, 아빠가 계신 곳은 낯선 환경이었다. 게다가 세 살 터울의 남동생이 생긴 이후로는 더 눈치를 봤다고 한다. 억센 나의 처남은 누나를 불청객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내 아내는 지금도 친정을 여느 친정처럼 드나들지 않는다. 언제나 첫 단추를 잘못 꿰면 그렇게 되고 만다. 장인어른은 지금도 술을 드시면 그때 이야기를 하신다. 그리고 나에게 미안해하신다. 하나뿐인 딸을 직접 기르지 못했다는 죄책감이다.
각설하고 아내의 외할머니는 100세 인생을 몸소 증명하신 분이다. 백세가 되는 해를 불과 사흘 앞두고 세상을 등지셨다. 나의 외할머니도 굉장히 장수하셨지만 이분이 한수 위다. 아흔이 넘으신 연세에도 정정하셔서 나의 두 아이를 꽤나 잘 돌봐주셨다. 아내가 직장과 육아를 감당하기 힘들어할 때 장모님은 여전히 현직에 계셨고 게다가 서울에서 먼 인천에 사셨기 때문에 우리는 아내의 친정 같은 외가 근처로 이사를 했다. 당시 처 외할머니께서는 미혼의 큰딸(처이모님)과 함께 사셨는데 이 두 분이 우리 아이들을 틈틈이 돌봐주셨다.
아내의 이모님은 평생 독신으로 사셨는데 초등학교 교사로 정년 퇴임하시고 소일거리가 없어 우울해하시던 때였다. 아이들을 어린이집에 맡기긴 했지만 아내와 내가 퇴근하기 전까지 비는 시간을 외할머니와 이모님이 채워 주셨다. 그래서 나에겐 이분들도 장모님이다. 농담처럼 주변에 하는 말인데 애틋한 면에선 이분들이 먼저다. 그렇게 나는 처외가 옆집 살이(?)를 4년 가까이하다가 어머니가 계신 본가 근처에 아파트를 분양받아 이사를 했다. 공교롭게도 우리가 떠난 후 외할머니와 처이모님께서는 급격하게 건강이 나빠지셨다.
특히 외할머니께서는 무릎에 힘을 주실 수 없어 일어서지도 걷지도 못한 채로 5년 넘게 집안에만 계시다가 백 번째 해를 맞이하기 직전에 조용히 눈을 감으셨다. 우리 가족의 부재가 이분으로 하여금 삶에 대한 마지막 의지를 꺾어놓은 것이 아닌가 하는 송구스러운 마음이 지금까지 남아있다. 내가 외할머니를 처음 뵀을 때가 이미 구순을 앞둔 시기였기에 이분의 젊은 시절 모습을 나는 알지 못한다. 그저 아내와 아내의 외가 어른들을 통해 들은 이야기로만 성정이 굉장한 분이셨던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내가 처음 뵀을 땐 이미 푸근한 할머님이 되어 계셨다. 늦둥이 막내딸 같은 나의 아내가 결혼하겠다고 데려온 나를 많이 이뻐해 주셨다. 처 외할머니는 평양 출신으로 저 유명한 1.4 후퇴 때 피난 내려와 살다 정든 곳(서울 뚝섬)에서 여생을 사신 분이다. 우리가 신혼 때 전세 들어간 집주인 아주머니는 외할머니를 너무나 잘 아는 분이셨다. 이 동네에서 그 어른을 모르면 외지인이라고까지 하셨다. 그 덕분에 집주인은 여러 가지로 우리의 편의를 봐주셨다. 처 외할아버지께서는 피난 내려온 1950년대에 뚝섬 인근에서 밀가루 공장을 운영하셨다. 제법 재산을 모으셨고 그 덕으로 3남 2녀의 자녀들은 경제적인 문제에서 해방되었다. 나는 이 분들이 전생에 큰 덕을 쌓았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마음이 편하다.
외할아버지께서는 시한부 말기암 판정을 받고 돌아가시기 전에 재산 문제를 깔끔하게 정리하시면서 당신의 부인께는 아무것도 남기지 않으셨다. 그분에게는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아내에게 재산을 증여하면 언젠가 또 자식에게 물려주려고 세금을 내야 하기 때문에 한방에 깔끔하게 처리를 하신 거다. 아내야 당연히 자식들의 어머니이니 알아서들 잘 모실 거라 굳게 믿었을 게다. 그 축복받은 자녀들이 처 외할머니께 그 뒤 어떻게 하셨는지 난 잘 알지 못한다. 아니 어설프게 아는 것을 떠들고 싶지는 않다. 다만 나의 처 외할머니께서는 스스로 거동하지 못하게 되신 이후로 5년 넘는 시간 동안 단 한 번도 집 밖을 나서지 못했다는 사실을 안다. 그 집 마저 둘째 아들 명의의 집이었지만 말이다.
물론 나도 이 문제에선 자유롭지 못하다. 그 5년 동안 가끔 찾아뵙고 인사만 드렸지 나조차도 이분을 모시고 나와 상쾌한 바깥공기를 마시고 따사로운 햇살을 느끼게 해 드리지 못했다. 그런 수고를 그분의 자녀들 중 누구도 하지 않고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아무튼 나의 처 외할머니께서는 평소 4~5층 건물 계단을 무시로 오르내리시던 분이었지만 마지막 5년은 고작 2층에 사시면서 한 발짝도 문밖을 나오지 못하셨다. 이 분을 임종 때까지 보살핀 분은 제 한 몸도 건사하기 힘든 칠순이 훌쩍 넘으신 처이모님이었다.
외할머니께서 돌아가신 이후 이모님은 동생들과 사이가 더 나빠지셨다. 외할머니의 마지막을 함께하면서 이모님도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피폐해지셨는데 동생들이 크게 도움이 되어주지 못한 것에 서운함이 크셨다고 한다. 그 일 때문인지 나의 처 외가는 여전히 형제들 사이에 상속재산 문제로 소송 중이다. 그 문제가 불거진 가장 큰 이유는 외할아버지께서 독신으로 사는 큰 딸을 걱정하여 가장 넓은 대지를 증여하셨는데 그 대지 위에 세워진 상가건물을 막내아들에게 증여하셨기 때문이다. 이 복잡한 재산권 문제를 논할 마음은 없다. 결국 이권이 개입된 가족관계는 심각하게 훼손된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을 뿐이다.
그리고 그 콩가루 같은 가족사의 한가운데에서 나의 처 외할머니는 외롭게 병마와 싸우다가 숨을 거두셨다. 아내는 외가 어른들의 성정이 외할머니를 닮아 유난스러운 탓에 서로 화해하지 못한다고 하지만, 내가 뵀던 처 외할머니는 이런 일로 형제간에 의가 상하실 분은 아니었다. 외할머니와 관련하여 내가 지금도 기억하는 일화 하나를 남긴다.
처외가 옆집 살이를 하던 시기였다. 이가 안 좋아 치과에 다녀온 아내가 심란한 이야기를 했다. 치아상태가 심각해서 대대적으로 손을 봐야 하는데 몇백만 원 정도는 각오해야 한다는 것... 분양받은 아파트 중도금 내기도 빠듯하여 전세 살던 아파트를 빼고 보증금이 낮은 상가주택으로 이사했던 우리에게는 한 푼이 아쉬운 시기였다. 더구나 아내는 당시에 기간제 교사를 하던 시기라 둘째를 임신한 후 다니던 학교를 나와 소득 없는 실업자 상태이기도 하였다. 그렇게 근근이 버티던 우리에게 3~4백만 원은 가볍게 당길 수 있는 금액이 아니었다. 아내는 그렇게 어려운 형편을 지나가는 말로 푸념 삼아 외할머니께도 이야기했던 것 같다.
외할머니께서는 번듯한 상가주택에서 월세를 받으며 사셨지만, 사실 건물주는 당신의 둘째 아들이었다. 그리고 독일에서 15년 가까이 유학생활을 했던 둘째 아들 부부가 학업을 마치고 돌아왔으나 건물 임대료 빼고는 뾰족한 수입이 없던 시기이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외할머니께서 우리 집에서 아이를 보아주시다가 가셨는데 아이 포대기 밑에 신문지로 싸인 돈뭉치가 나왔다. 꼬깃꼬깃한 만 원권으로만 채워진 돈뭉치가 제법 두툼하여 아내가 세어보니 딱 5백만 원이었다. 그 만 원권은 외할머니 댁의 상가에 입주한 가게들에서 나온 것임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시장통에서 거래되는 상인들의 돈은 대부분 험하게 다뤄지기 쉽다. 그렇게 헤지고 찢어져 테이프로 붙인 흔적이 역력한 만 원권들이 무려 5백 장이나 되었다.
나는 쪽지 한 장 없이 돈만 놓고 가셨는데 그게 우리에게 주신 거라 어떻게 알 수 있냐고 했지만, 아내는 눈물을 흘렸다. 처 외할머니께서는 글을 배우지 못하셨다고 한다. 대신에 셈이 매우 밝으셨단다. 아마도 둘째 아들의 눈치를 피해 몰래몰래 꼬불쳤던 만 원권을 모아두셨다가 슬며시 놓고 간 것이다. 내가 있어서 말을 못 하고 가셨는데 나중에 아내가 물어보니 이렇게 말씀하셨단다.
"절대 딴 데다 쓰지 말고 너 이 하는 데에 써라... 꼭 너 이빨 하는 데에 써라"
아내는 한동안 치과치료를 열심히 다녔으나 결국 외할머니께서 주신 돈의 절반도 못쓰고 치과를 끊었다. 나머지 돈이 어디에 쓰였는지 나는 모르지만, 언제나 외할머니께는 죄스럽다.
밤에 주무시다가 돌아가신 처 외할머니의 임종을 지킨 가족은 없다. 평소 아침 일찍 일어나시는 부지런한 분께서 해가 중천에 뜨도록 기척이 없는 게 이상해서 이모님이 방에 들어가 보셨는데 흔들어도 깨지 않으시는 걸 보고 혼비백산하여 가족들에게 연락을 해서야 모두들 돌아가신 걸 알았다. 열흘 가까이 해외출장을 다녀와서 잠시 여독을 풀려던 때에 이 소식을 들었던 나는 군말 없이 3일 내내 빈소를 지켰다.
경기도 남양주에 있는 천주교 공동묘지에 묻히신 처 외할머니의 세례명은 사비나였는데 비석에 골룸바로 적혀 있어 가족들이 속상해 했다. 아흔아홉 해를 사시면서 내 아내와 나의 두 아이를 돌봐주신 외할머니가 해주시던 슴슴한 평양 만둣국은 일품이었다. 그리고 아흔이 넘은 연세에도 묵직한 우리 둘째를 안고 자장자장을 해주시면서 항상 혼잣말 비슷하게 이렇게 말하셨단다.
"우리 OO이 커서 꼭 니 큰아빠처럼 돼라~"(우리 아이의 큰아빠는 서울대를 나왔다. ㅡ.ㅡ;;)
내가 아내의 외할머니에 대해 기억하는 게 고작 이 정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