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MEMENTO MORI 07화

처숙(a.k.a Sun Power)

Memento mori 7

by 낙산우공

이 분을 Sun Power라고 부른다는 걸 알게 된 건 결혼하고 새해를 맞아 아내의 큰집에 세배를 가서였다. 장인어른께서는 4남 2녀 중 막내셨는데 드라마에서나 보던 명절문화가 그곳에는 여전하였다. 요즘은 혼수로 한복을 하는 사람이 잘 없다지만 전직 한복 재단사였던 나의 어머니는 내게 두루마기까지 풀세트로 한복을 맞추게 하셨다. 덕분에 잔뜩 치장하고 아내의 큰집에 인사를 갔다. 이른 아침부터 가까이 사시는 둘째 큰 아버님 댁까지 돌았지만 해가 지고 밤 10시가 넘어서야 우리는 비로소 처가에 돌아올 수 있었다.


그분께는 2남 1녀의 자녀들이 있었는데 제일 위에 큰 딸 가족이 시댁을 거쳐 친정에 온 뒤에도 두 아들 부부와 가족들은 처가에 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크게 불만을 드러내지 않는 모습이 그분들께는 아주 익숙한 일인 듯했다. 막냇동생인 장인어른도 그런 큰집의 명절 분위기에 일조하셨다. 밤늦도록 윷놀이에, 화투에, 술자리에 왁자한 명절 분위기가 이어졌다. 장모님은 그런 자리를 싫어하셨지만 평소 직장을 핑계로 시댁 행사에 열외이셨기 때문에 그날만큼은 흥을 깨지 않으려 하셨다.


그 댁의 그런 분위기가 가능했던 건 큰 아버님의 존재가 결정적이었다. 장인어른은 막내여서 큰 아버님과 터울이 꽤 크게 난다. 큰어머님께서 시집을 오셨을 때 장인어른은 초등학생이셨고, 큰어머님이 어린 장인어른을 키우다시피 하셨다고 들었다. 장인어른은 1948년 서울에서 태어나셨는데 아버지께서 6.25 전쟁 통에 행방불명이 되셨다고 하니 거의 유복자나 다름없이 자라셨다. 그때부터 아내의 큰 아버님(처숙)은 형제들 사이에서 아버지의 역할을 해오셨다. 그러니 그곳은 나의 장모님께 시(어머니) 댁이었다.


큰 아버님은 어린 나이에 사범학교를 나와 평생 초등학교 교사로 재직하셨다. 아마도 갓 스물이 되던 시절부터 홀어머니를 모시고 동생들을 챙기는 가장으로 살아오셨을 것이다. 3명의 남동생들을 대학에 보내고 결혼시키고 하셨기에 큰 아버님 내외분은 나를 손주 사위 대하듯 하셨다. 당신 손주들의 안 입는 옷가지나 장난감을 잔뜩 챙겨 두셨다가 우리 큰애가 생겼을 때 전부 물려주시기도 했다. 결혼한 뒤로도 나는 자주 아내의 큰집 경조사에 참석하였고 큰집의 형님들과도 꽤 격의 없이 지내게 되었다.


처음 Sun power라는 별명(분명 장모님께서 지으신 걸로 추측되는)을 들었을 때 굉장히 가부장적이고 권위의식이 가득할 것이라 생각했지만 내가 기억하는 그분은 그렇지 않으셨다. 화내는 모습을 보지 못했고 굉장히 호인이셨다. 큰어머님과의 관계도 원만하셨고 자녀들과도 그랬다. 특히, 막냇동생인 나의 장인어른에 대해서는 서로가 각별하셨다. 그래서 그분의 장례식은 유난히 엄숙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큰 아버님께서는 팔순을 넘기시고 얼마 안 있어 몸져누우시더니 몇 년을 요양병원에서 지내시다가 돌아가셨다.


큰 아버님의 건강이 나빠진 이후 장인어른은 명절에 외로움을 많이 타셨다. 큰집의 가족들과 예전처럼 왕래하기 어렵다는 걸 아셨지만 삶의 큰 부분이 떨어져 나간 듯 허전해하셨다. 명절 때마다 서울 인근의 가족묘에 들르는 것으로는 성이 차실 리가 없었다. 아마도 나의 장인어른만이 그 허전함을 몸소 느끼는 유일한 분이었을 것이다. 장인어른께는 세분의 형님과 두 분의 누님이 계셨는데 둘째 형님은 내가 결혼하고 얼마 안 되어 돌아가셨다. 셋째 형님 분은 젊어서 아내와 이혼하고 아들 하나를 데리고 미국으로 이민을 가셨는데 연락이 끊긴 지 오래되었다고 한다. 큰누님 부부, 둘째 매형도 모두 돌아가셨고, 둘째 누님만 남으셨는데 딱히 왕래가 잦지는 않았다.


언젠가 장인어른께서 나에게 당신의 큰 형님 말씀을 하시다가 갑자기 이런 이야기를 꺼내셨다.

"우리 집 남자들 수명이 잘해야 너희 큰 아버님 정도라고 생각한다. 그러니 나도 얼마 안 남은 거야... 나도 살만큼 살았고 너희들도 잘 살고 있으니 내가 무슨 아쉬움이 있겠니..."

진심으로 하신 말씀이었지만 한 사람의 인생이 이렇게 간단히 정리되는 거구나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다.


큰 아버님은 체구가 장대하셨다. 장인어른보다도 훨씬 연세가 많으셨는데 키도 몸집도 더 크셨다. 처음 보는 사람들은 충분히 어려워할 만큼 연세도, 거기서 풍겨 나오는 권위도 굉장하셨다. 그런데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는 항상 말끝에 '~이러니, ~저러니' 하면서 친한 동무 대하듯 하셨다. 아마도 오랜 초등학교 교직생활의 결과일 것이다. 그래서 인상과 달리 훨씬 친근하게 기억되는 것 같다. 큰 아버님은 박봉의 교사 월급으로 가족과 형제를 건사하며 어렵게 사셨지만 산업화와 개발로 상징되는 60~70년대를 지나오셨던 탓에 말년에는 제법 풍요롭게 사셨다. 투기를 하신 것도 아닌데 성실하게 그리고 나름 현명하게 재테크를 하신 것이라 생각한다.


그 어른은 친근하고 다정하셨지만 천상 구세대의 사고가 몸에 베이셨다.(나쁜 뜻으로 하는 말이 아니다) 아들 둘을 두셨는데 모두 딸만 둘씩 낳아서 늘 서운해하셨다. 한 번은 그중 나이가 어린 둘째 아들에게 셋째 아이를 낳아주면 아들이든 딸이든 내 전재산을 너에게 주겠다고 하셨단다. 그리고 그 형님은 단칼에 제안을 거절하셨다고 한다. 내가 아는 그 집 형제들은 충분히 그러고도 남겠다 싶었다.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가족이었다.


큰 아버님은 너무 이른 나이에 가장이 되었다. 그래서 빨리 취업할 수 있는 사범학교를 다니셨다. 분명 꿈도 야망도 있으셨을 텐데 아마도 많은 것을 포기하고 사셨을 것이다. 오랜 교직생활을 하셨지만 교직의 꽃이라는 '교장선생님'은 결국 하지 못하시고 교감으로 정년을 맞으셨다. 그래서 장모님의 교직생활에 든든한 후원자가 되어주셨고 장모님이 교장선생님이 되었을 때에는 자기 일 만큼 기뻐하셨다. 그랬던 분이 급격하게 총기가 떨어지고 건강이 안 좋아진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은 당신의 큰 외손주 결혼식에서였다.


큰 아버님은 첫째로 딸 하나와 그 아래 아들 둘을 두셨는데 첫째 딸 역시 딸 하나만 낳았다.(즉 다섯 명의 손녀를 두신 것이다) 그 손녀의 결혼식에서 큰 아버님은 나를 알아보지 못하셨다. 약주가 과하셔서 그렇다고 하였지만 10년 넘게 보아오던 분이라 너무나 의외였다. 그것이 그분의 조금은 서글픈 말년을 알리는 첫 신호였다는 것도 아주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당시 외손녀의 결혼식이 급하게 치러진 이유는 따로 있었다. 큰 아버님의 사위(외손녀의 아버지)가 말기암 투병 중이었고 하나뿐인 딸아이가 출가하는 것을 보겠다는 일념으로 서둘로 결혼식을 올린 것이다. 큰 아버님은 그 사실을 모르시는 눈치였다.


무슨 일이든 서두르다가 그르치는 경우가 많다. 급하게 서둘러 결혼한 큰 아버님의 손녀는 얼마 안가 별거를 하였고 결국 이혼을 했다. 그 중간에 하나뿐인 당신의 사위는 유명을 달리하였다. 다행히 큰 아버님은 이미 요양병원에 계셔서 그 사실들을 모두 모르셨다고 한다. 큰 아버님께서 요양병원에 가시게 된 사연은 더 서글프다. 큰 아버님과 나의 장인어른 모두 평소 주량이 대단하시다. 술을 좀 마신다는 나조차 감당하기 어려웠으니 그분들의 젊은 시절은 정말 두주불사였을 것이다.


그런 큰 아버님께서 어느 명절날 장인어른을 보시더니

"집안에 양주가 저렇게 많은데 이제 내가 살 날이 얼마 안 남아서 저걸 다 못 마시고 갈 거 같다. OO아, 너 온 김에 나랑 저 술 다 먹자..."(ㅡ.ㅡ;;)

그날 꽤 오랫동안 꽤 많은 양의 술병이 바닥을 보였다고 한다. 그 뒤로 큰 아버님은 몸져누우셨고 결국 요양병원에 몇 년 누워만 계시다가 생을 마감하셨다. 한동안 큰어머님께서는 나의 장인어른을 많이 미워하셨다. 큰어머님은 큰 아버님께서 돌아가신 뒤 홀로 된 큰딸과 사셨다. 한동안 이혼한 외손녀도 함께였다고 하니, 그저 그분들의 말년을 생각하면 쓸쓸하고 휑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렇게 쓸쓸하게 노년을 보내시던 큰어머님께서 작년에 돌아가셨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뒤숭숭했지만 나는 시간을 내어 잠시 장례식장을 찾았다가 한 시간 만에 돌아왔다. 그곳에 남아있던 큰 아버님의 자녀들과 손주들을 보는데 울음기 없는 무표정한 얼굴이었지만 무언가 알 수 없는 슬픔이 느껴졌다. 그 슬픔은 처연함이었다. 큰어머님은 큰딸과 아침식사를 하시던 중에 기도에 음식이 걸려서 급사하셨다. 응급조치를 할 겨를도 없이 허망하게 가셨다고 한다. 그 사인이 나의 마음을 더 스산하고 황량하게 만들었다.


내가 큰 아버님을 뵌 시간은 많지 않다. 그렇게 스치듯 지나간 몇몇 에피소드로 나는 그분을 기억하지만 꽤 오래 그분을 지켜본 것처럼 그분의 성품과 삶의 흔적이 느껴지는 것은 그분이 유난히 좋은 분이었기 때문이다. 형제가 많은 가족에서 장남의 존재가 굉장했던 시절이 있었다. 그런데 그 시대에도 그 존재감을 온전히 지켜낸 이는 많지 않다. 명절마다 반복되어온 다양한 가족사를 담은 드라마를 보라. 그런데 나는 그 분과 그분의 가족을 보면서 아내에게 여러 번 이렇게 얘기했다.

"아, 정말 저렇게 살아오신 분이 계신 거구나. 그게 드라마 속에서나 가능한 이야기라고 생각했는데..."

그분의 두 아들은 드라마 속 어느 아들보다 효자였다. 그런데 그 지극함이 가식적이거나 인위적이지 않았다. 그분들은 굉장히 쿨하게 자신의 역할을 다하고 있었다. 난 볼 때마다 그 모습이 너무나 신기했다. 그런 한 가정의 말년이 너무 쓸쓸하여 나는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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