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ento mori 8
고모께서 많이 아프시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게 가물가물하지만 1~2년 전이었던 것 같다. 아버지께서 살아계실 때는 당신께 하나뿐이었던 여동생, 막내 고모를 뵐 일이 많았다. 가깝게 살지는 않았어도 할아버지, 할머니 제삿날에는 꼬박꼬박 우리 집에 오셨고 그렇게 드문드문 소식을 전하며 살았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후에도 어머니와는 연배가 비슷한 친구 같은 사이여서 간혹 어머니를 모시고 고모댁에 들르곤 했다. 언제나 그 일은 한가한(?) 내 몫이었다. 어머니는 막내 고모와 전화로 혹은 만나서 몇 시간씩 이야기를 나누셨다. 막내 고모가 독신주의여서 늦게 시집을 간 탓에 어머니께서 고된 시집살이를 하는 동안 유일한 말벗이 되어 주셨다고도 한다. 그래서 가끔 다투기도 하셨지만 금세 풀어지곤 하셨다.
바쁘다는 핑계로 형제간에도 잘 안 만나고 사는 세상인지라 그 뒤로도 고모댁과의 관계는 점점 소원해졌다. 고종사촌들을 길에서 만난다면 서로 못 알아볼 수도 있을 정도가 되어갔다. 20년 전 내 결혼식 전날 우리 집에 오셔서 어머니와 하루 종일 이야기를 나누시던 게 고모와 가장 오래 시간을 보냈던 기억으로 남았다. 당신 결혼하시기 전에 장조카인 큰형을 손수 키우다시피 했는데 안부 전화 한 통 없다는 서운한 말씀을 조심스럽게 하셨다. 나는 마음이 불편하여 집에 돌아가시는 길에 따라 나가 택시를 잡아드리려 했는데 한사코 거절하시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그 고모께서 지난 주말을 앞두고 세상을 등지셨다.
내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게 1991년 겨울이니 한세대가 되는 30년 만에 내 아버지의 형제분들은 이제 아무도 세상에 살아 계시지 않는다. 아버지는 위로 누이 두 분과 아래로 여동생 한 분을 두셨는데 둘째 고모는 40대 한창나이에 지병으로 일찍 세상을 뜨셨고 큰고모께서도 10여 년 전 노환으로 돌아가셨다. 마지막 남았던 한 분 막내 고모마저 세상을 하직하였으니 나는 이제 아버지와 인연이 되는 근친을 찾기 어렵다. 그렇게 세월은 모든 것을 정리해 버렸다.
내가 기억하는 막내 고모는 점잖지만 똑똑하고 영리한 분이셨다. 공부를 하셨다면 야무지게 했을 것 같았던 막내 고모는 여자라는 이유로 학교에 가지 못하셨고, 선보는 사내들이 모두 시원찮아 보여 결혼을 거부하셨다. 젊은 나이에 홀로 되셨던 나의 할머니는 그런 막내딸 때문에 속을 많이 썩이셨다. 당시로는 늦어도 한참 늦은 서른이 다 되어 결국 결혼을 하셨지만 순하고 성실하셨던 고모부를 썩 마음에 들어 하지는 않으셨다고 한다. 그래도 내가 뵀던 두 분은 사이가 좋으셨다. 고모부께서 워낙에 호인이셨다. 지금 생각해보면 다소 기가 세신 고모에게 많은 부분을 양보하셨던 것 같다.
고모는 슬하에 1남 3녀를 두셨다. 딸 셋을 내리 낳고 막내로 아들을 얻었다. 그 아이는 나보다 여섯 살 정도 어린 친구였는데 40대 중반이 된 아직까지 결혼을 하지 않았다. 돌아가시는 순간까지 마음이 많이 아프셨을 것이다. 늦둥이 아들이라고 평소에도 각별히 애정을 쏟으셨던 걸 잘 알고 있으니 말이다. 고모의 딸 셋 중 둘은 나보다 위의 누나들이고 셋째 딸이 나보다 두어 살 어렸다. 누나들은 잘 모르지만 나와 또래가 비슷했던 셋째 딸은 고모를 닮아 똑똑하고 야무졌다. 중학교 때까지 전교 1~2등을 놓치지 않는 아이였는데 집안 형편이 어려워 실업계 고등학교에 진학을 했다. 취업을 했다가 뒤늦게 대학에 진학을 하였지만 계속 공부를 했더라면 아마 지금보다 훨씬 나은 삶을 살았을 것이다. 고모는 항상 셋째 딸을 공부시키지 않았던 것을 미안해하셨다. 가끔 나도 사촌동생을 보며 나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고모는 공부에 대한 미련이 많이 남으셔서 다 늦은 나이에 검정고시 학원을 다니셨다. 어머니를 통해 들은 이야기로는 고모께서 배우는 속도가 남다르셨고 공부 재미에 푹 빠지셨다는 거였다. 그것도 한참 옛날이야기라 그 뒤로 어디까지 학업을 계속 이어가셨는지는 잘 모른다. 내 부모님 세대에게 학업은 선택지가 아니었다. 우리 세대가 학업 스트레스를 이야기할 때 어른들이 배부른 소리라고 비난하면 나는 할 말이 없었다. 그분들께는 더 나은 삶을 꿈꿀 수 있는 기회조차 박탈되었기 때문이다. 나의 아버지는 중학교 2학년 때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셨는데 당장 집에 농사지을 사람이 없어서 1년을 휴학하고 집안일을 도우셨다고 한다. 딸부자 집에 귀하디 귀한 외아들이었는데도 말이다. 아버지께서는 결국 간신히 중학교를 마치고 더 이상의 진학을 포기하셨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당신께서 딱히 공부에 흥미가 없으셨다고 말하시면서 학교에 보내주지 못한 할머니를 원망하지 않으셨다. 아버지는 나와 달리 지극한 효자셨다. 내 아버지의 유려한 필체를 보면 그 말씀이 거짓말이었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내가 고등학교 1학년 때 사학과에 진학하고 싶다고 했을 때 아버지께서는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이 한마디를 남기셨다. "굶어 죽기 딱 좋겠다..." 나는 이과를 선택해서 컴퓨터공학과에 진학했다. 아버지는 티를 내지 않으시려 했지만 좋아하셨다. 내 아버지는 권위적인 분이 아니었지만 나는 그분을 거스르고 싶지 않았다. 난 지금도 그 선택을 후회하지 않는다. 지독한 컴맹(?) 소리를 들으며 대학을 간신히 졸업했어도 말이다.
막내 고모댁은 고향에서 농사를 지으시다가 나름 서울에 와서 자리를 잡은 내 아버지를 따라 뒤늦게 서울로 올라오셨다. 아마도 내 아버지와 같이 자녀교육을 위해서 선택하신 길이었을 것이다. 고모부께서는 서울 외곽의 한 대기업 공장에서 일을 하셨는데 수입이 넉넉한 편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나마 이재에 밝은 막내 고모께서 재테크 삼아 집을 사고팔아 경제적으로 큰 도움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어머니께 들었다. 그런데 고모댁의 형편은 그 뒤로도 크게 나아지지 않았고 고모부께서도 건강이 안 좋으셔서 일을 하기 어려워지셨다. 그러는 동안 고모댁은 서울 외곽의 단독주택에서 서울 밖으로 여러 차례 옮기셨고 돌아가시기 전에는 동두천에 사셨다. 막내 고모의 장례식장도 그곳이었다.
고모께서 몸져누우셨다는 소식을 듣고 한번 찾아봬야지 하다가 시간이 흘러 이제 다시는 볼 수 없게 되었다. 막내 고모께 죄송한 마음은 금할 수 없지만 이제 내게는 사죄할 대상이 없다. 나도 한 때는 어머니를 모시고 집안 어른들의 대소사에 꼬박꼬박 참석하였다. 바쁜 형들을 대신하여 아버지 외숙모님의 팔순잔치에 까지 간 적이 있다. 그런 곳에 갈 때마다 나를 알아보는 분은 아무도 안 계셨다. 당시 어른들께는 자식은 장남으로 수렴되는 경향이 있다. 내가 막내라고 하면 어김없이 돌아오는 대답은 "형은 어딨니?"였다. 언제부터인가 나도 그런 곳에 참석하고 싶지 않아 졌다. 그 바람에 고모께 제대로 하직인사도 못하는 못난 조카가 되고 말았다.
막내 고모의 부고를 보고 고모의 성함을 처음 알았다. 대한민국에서 여자의 이름은 항상 아이를 낳은 후부터 OO이 엄마가 된다. 그래서 우리 고모의 이름은 내게 "정화 엄마"였다. 그런데 내가 처음 듣는 고모의 이름을 보고 나니 왈칵 눈물이 날 뻔했다. 우리 고모의 이름은 봄 춘자에 계집 희자, 봄처녀였다. 나의 고모는 봄처녀답게 여름을 보기 전 화려한 봄날에 하늘로 가셨다.
삼가 춘희, 베로니카 여사님의 명복을 빕니다. 부디 그곳에서는 평온하고 행복하시기를 진심으로, 진심으로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