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배사, 박수 그리고 화합주

공무원 회식의 필수코스

by 낙산우공

대한민국에서 어떤 조직이든 회식을 하지 않는 곳은 없다. 그런데 드라마에서처럼 모든 사고는 회식자리에서 터진다. 회식은 단합을 명분으로 하지만, 대한민국의 회식에는 술이 빠지지 않기 때문이다. 취중진담인지 주사인지 모르는 말들이 오가다가 누군가의 심기를 건드리게 되고 그것이 취기와 함께 상승작용을 일으켜 급기야 폭언이나 폭력이 오가는 지경에 이르곤 한다. 공무원 조직도 예외일 수는 없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거리두기와 재택근무가 일상이 된 탓에 불타는(?) 회식자리가 많이 줄었지만 이제 다시 예전의 영화를 되찾으려는 듯 술자리가 이어질 것이다. 내가 경험한 공무원의 회식은 항상 뻔한 레퍼토리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건배사로 시작해서 화합주로 끝나는 공무원 회식의 식순은 변하지 않는다. 혹자는 이런 말을 했다. 술집에서 회식하는 무리가 있을 때 그들이 공무원인지 아닌지 구분하는 방법이 있는데, 회식이 끝날 때 모두가 박수를 치면 공무원이란다. 맞다. 공무원은 꼭 박수를 친다. 회식도 중요한 행사이기 때문에 마침표를 찍어야 비로소 회식이다.


지금은 코로나19 등 감염병 유행으로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되었지만 과거 회식 자리에서는 술잔을 돌리는 게 관례였다. 윗사람에게 내 술잔을 건네 따라드리고 그분이 하사하시는 술잔을 다시 받는 게 일상이었다. 회식자리에 가면 적당한 기회를 봐서 그날의 VIP 옆에 다가가 자신의 술잔을 올리는 것이다. 이 타이밍을 잘 잡아야 하고 적당한 양의 술을 따르는 것이 예의다. 모든 부하직원의 술잔을 받아마시다가는 제아무리 두주불사인 상사라도 감당할 수 없으니 말이다. 눈치 없이 술을 가득 따르는 직원에게는 상사가 술잔을 느닷없이 들어버려 술이 바닥에 쏟아지는 응징(?)이 돌아왔다.


이런 술잔 돌리기가 위생상의 이유로 자취를 감춰가던 시절에도 여전히 건배사는 유효했다. 그날의 호스트로부터 시작하는 건배사는 결국 말단 직원까지 모두가 거쳐가야 하는 필수코스였다. 이때 얼마나 참신하면서 유쾌한 건배사를 준비하느냐가 조직생활의 성패를 좌우하기까지 했다. 제법 연륜이 갖춰진 직원일수록 내공이 느껴지는 건배사를 했다. 인터넷 검색으로 찾아지는 뻔한 송년사가 아니라 따로 준비했다는 인상이 짙은 아이디어들이 각축을 벌였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그날의 호스트를 위한 헌사가 빠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언제나 헌사를 생략했다. 나의 조직생활이 어떠하였는지는 말하지 않겠다.


이렇게 그날의 참석자가 모두 한 마디씩 건배사를 던지고 나면 마지막은 화합주의 시간이었다. 회식 테이블 위에 올라와 있는 모든 술을 커다란 양푼에 남김없이 붓고는 순서대로 돌아가면서 마셨다. 이것이 화합주인 이유는 남겨진 모든 술을 섞었다는 의미와 함께 그 술을 남김없이 마셔야 한다는 의무가 더해졌기 때문이다. 가령 그날의 참석자가 모두 10명이라고 하면 마지막에 가장 높은 지위의 상사가 마시게 되어 있는데 얼마가 남겨져 있건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마셔야 하는 것이다. 그럼 어떤 현상이 벌어질까? 술을 제법 잘 마시는 사람들은 다른 동료들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양껏 퍼부어야 하는 것이다.


마지막에 양푼을 든 상사에게 많은 양의 술이 남아있으면 그날의 화합은 실패로 끝난다. 우리는 적당한 양을 마시되 그날의 호스트가 멋지게 대미를 장식할 수 있는 정도의 술을 남겨야 하는 것이다. 눈치게임이 따로 없다. 모든 직원이 서로서로 러브샷을 하고 모든 직원이 남겨진 술을 나눠 마셔야 끝나는 회식은 나에겐 끔찍한 기억이다. 이제 이런 관행이 많이 사라졌다고는 하지만 대한민국 공공부문은 아직도 이 문화가 남아있다. 정말로 놀라운 것은 그날의 호스트가 모든 대화를 주도한다는 것이다. 10명이 모였건 20명이 모였건 관계없다. 모든 직원이 한 사람에게 주목하고 그는 끊임없이 말을 한다.


내가 공무원이 되어 회식에 참석했을 때 그나마 편했던 것은 친하지 않은 이와 굳이 말을 섞지 않아도 되는 것이었다. 공무원 회식에는 지역방송이 없다. 그저 한 사람에게만 주목하면 되었다. 그의 이야기는 끝도 없이 이어졌다. 젊은 시절 혈기 왕성할 때 이루어놓은 업적과 타 기관(부처)과의 경쟁에서 승리(?)한 이야기를 생생하게 쏟아내었고, 심지어는 첫사랑 이야기를 꺼내는 이도 있었다. 지겹고 졸리지만 나에게 무언가를 강요하지는 않았다. 그저 영혼 없는 리액션이면 되었다. 그리고 단 한차례의 건배사를 인상 깊게 남기는 것... 그것이 공무원 세계의 문화였다.


내가 모셨던 분들이 했던 건배사 중에 기억나는 게 있다. 좋아서 기억하는 건 당연히 아니다. 그 거창한 건배사는 바로 "명예와 사명감"이었다. 건배를 제의한 이가 "명예"라고 외치면 모두가 "사명감"이라고 되받아주는 식이다. 나는 이 건배사가 너무나 오글거렸다. 그분이 이렇게 자신의 건배사를 소개했다.


"공무원은 "명예"와 "사명감"으로 일합니다."


난 기함을 했다. 명예라는 말과 사명감이라는 말을 어쩌면 저렇게 스스럼없이 내뱉을 수 있을까? 기가 막혔다. 그분은 정말로 그렇게 믿고 있었던 것이고, 나는 그게 더 충격적이었다. 명예는 그렇게 가볍게 언급할 수 있는 단어가 아니다. 그 말에는 숭고함이 함축되어 있다. 내가 만나본 모든 공무원은 "승진"과 "우월감"으로 일했다. 그 두 가지를 얻기 위해 그들은 치열하게 일한다. 동전의 양면과 같았다. 승진하면 우월감은 배가되니까... 그걸 명예와 사명감으로 포장하다니... 그 뻔뻔함에 나는 치를 떨었다.


공무원의 회식은 누군가의 우월감을 확인해 주는 자리였다. 반드시 주인공이 있으며 모든 의전은 그에게 집중되었다. 공무원은 큰 행사를 많이 치른다. 그래서 의전을 과하게 따진다. 공무원들이 행사에서 의전을 챙길 때 중요한 원칙이 하나 있다. 어떤 행사건 VIP는 한 명이란 것이다. 제아무리 지위가 높더라도 가장 상위의 VIP에게 모든 의전은 집중된다. 나머지는 고려하지 않는다. 그걸 놓치면 행사는 망친다. 언제나 명심해야 하는 원칙이었다. 회식은 중요한 행사 중 하나였다. 이렇게나 우리는 구식이다.


* Image by Pexels from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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