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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낙산우공 Jun 21. 2022

하기 싫은 것들

삶은 진화한다(2015.04.10)

개인의 욕망에 충실하고, 포장되고 조작된 것이 아닌 진짜 욕망에 주목하고, 100세 인생을 바라보는 시점에 모든 걸 내려놓을 각오로 자신의 지나온 삶을 돌아보라. 각종 매체를 통해 들려오는 21세기형 인간이 따라가야 할 삶의 방식이다. 성실함과 우직함으로 승부했던 과거의 가치는 창의성과 상상력이 세상을 바꾸는 21세기에는 폐기 처분되었다. 그렇게 주입식 교육과 경쟁사회에 익숙했던 우리는 세상의 새로운 조류를 학습하고 적응해야 한다. 그것이 적자생존의 진화 가설에 순응하는 길이다.

그래서 진정한 자기 욕망이 가리키는 길을 찾아보려 하지만, 대부분의 이들이 부딪히는 문제는 스스로 욕망의 존재를 발견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우린 욕망을 감추거나 억누르며 살아왔기 때문에 그것이 잠재되어 있는지도 인식하지 못할뿐더러 욕망이 지향하는 삶의 방식을 유추하지도 못한다. 이럴 때 사용하는 방법은 욕망하지 않는 것, 아니 끔찍하게 하기 싫은 것들을 찾아내어 나열하다 보면 진정코 욕망하는 것이 남게 된다고 한다. 그래서 실행해 본다. 내가 끔찍하게 하기 싫은 것들이 무엇인지 하나씩 찾아내고 그것들을 구체적으로 분류하다 보면 내 욕망이 가리키는 삶의 방향이 찾아질지 모른다는 희망을 안고...


1. 시간에 쫓기며 일하기.

2. 만나기 싫은 사람과 만나기.

3. 잘 모르는 사람과 통화하기.

4. 대화하기 싫은 사람과 대화하기.

5. 읽기 싫은 책 읽기.

6. 영어 실력(실력이라고 할 수 있을까 싶지만) 쌓기.

7. 통계분석 습득하기.


그냥 하기 싫은 게 아니라 정말 끔찍하게 하기 싫은 것들만 골랐다. 한번뿐인 삶에 하기 싫은 것을 하면서 산다는 것만큼 불행한 일도 없다. 그것이 일회성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매우 자주 반복된다면 말이다. 중학교 시절 음악수업과 체육수업이 끔찍하게 싫었던 적이 있었다. 아마도 담당 과목 선생님의 영향이 컸겠지만, 그 수업이 있는 요일에는 하루 종일 우울했던 기억이 난다. 아니 수업시간 전까지는 공포에 가까운 긴장감이 생기기도 했다. 혹시나 나를 호명하고는 익숙하지 않은 것을 시켜서 망신을 주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 같은 것 말이다. 아마도 그런 트라우마가 생길 만큼 모욕감을 느꼈던 경험이 있었을 것이다. 지금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아무튼 하기 싫은 일들을 나열해 보았지만, 어떻게 살아야 할지는 알 수 없다. 그저 직장과 사회적 관계를 끊으면 해결되는 일들이니 말이다. 문제는 그 결정을 방어할 경제력이 뒷받침되지 않는다는 것이고, 그 결정 뒤에 따르는 감당하기 힘들 만큼 긴 시간을 채울 방법이 언뜻 떠오르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몹시 하고 싶은 일들을 나열해 보는 수밖에 없다.


1. 한가롭게 거닐기(유유자적).

2. 읽고 싶은 책(연초에 복지포인트를 몰빵 해서 사모은 책들) 읽기.

3. 연애하기(그저 욕망에 충실하게 썼을 뿐...-.-;;;).

4. 글쓰기.

5. 개인 작업실 만들기.

6. 개 키우기.

7. 정원 만들기.


헐~... 정말 아름답게 정년을 채우고 은퇴하더라도 실행할 수 있을까 싶은 것들 뿐이다. 우리는 개인의 욕망에 주목하고 그것들을 자유롭게 발현시키는 방향으로 삶을 끌어가야 하지만, 현실은 녹녹지 않다. 우리의 삶은 해야 할 것과 하고 싶은 것을 구분할 수 있지만 실천할 수 없다. 아니 실천하기 힘들다. 많은 것을 내려놓아야 가능하다고 하지만, 내가 내려놓을 수 있는 것은 나 자신뿐이다. 내가 짊어져야 하는 삶의 무게를 내려놓는 것은 직무유기다. 욕망에 충실하고 싶은 자가 짊어져야 할 것들을 잔뜩 만들어 놓은 것이 잘못이다. 즉, 때는 이미 늦었다. 내게 어마어마한 요행이 일어나지 않는 한 말이다.


세상은 이분법처럼 명쾌하게 구분되지 않고, 인간이 만들어 낸 개념에 포섭되지 않는다. 수학의 원리는 책 속에만 유효하다. 모든 적용에는 변수가 있고 오차가 있다. 어떤 것도 단일한 의미로 해석될 수 없다. 우리는 욕망에 충실해야 하지만, 주어진 삶을 외면해서도 안된다. 인도의 신분제도처럼 사람마다 하늘이 내린 신분과 직업이 있다는 맹신도 끔찍하지만, 점점 약육강식의 밀림을 닮아가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모든 책임과 의무를 내려놓은 채 하고 싶은 것에 집중하는 것처럼 무책임한 것도 없다.


며칠 전 지인을 통해 들은 한 젊은이의 이야기가 떠오른다. 그 친구는 유복한 가정환경에서 자라 대학 졸업도 포기한 채 인도로 라오스로 여행을 다니다가 돈 떨어지면 집에 연락을 하더니 급기야 어릴 적 양육을 도맡으셨던 외할머니의 간곡한 호소로 겨우 대학을 마쳤고, 부모가 노후를 위해 장만한 집을 팔아 북촌의 한 가옥을 구입하여 인도차를 파는 카페를 차려줬다는 이야기였다. 타고난 지능이 있었던지 그렇게 욕망에 충실하면서도 소위 명문대를 졸업하였지만, 여전히 일주일에 절반은 유유자적 여행을 다니고 나머지 절반만 카페를 지킨다고 한다. 그리고 똑같은 성향의 아내를 만났다고 한다. 그 노부모의 하소연을 들은 지인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그저 부아가 치밀 수밖에 없었다.


천성이 자유로운 영혼 중엔 욕망에 충실하다가 거지되기 십상이다... 지인의 이야기 요지는 그들이 요란하게 사치, 허영을 부리는 게 아니라 배낭 들쳐 메고 자유롭게 여행하다가 돈 떨어지면 아르바이트를 해서 비용을 조달하고 그마저 바닥나면 집에 전화를 건다는 거였다. 독립하여 자신의 삶을 책임지지 못하고 욕망을 쫓는 것보다 사치스러운 삶이 있을까?


성인과 아동을 구분 짓는 가장 중요한 기준은 나이도 지적 능력도 성숙도도 아닌 독립심이다. 그는 독립할 의지도 필요도 잊은 채 마냥 즐거운 우리 아이들과 똑 닮았다. 서른이 넘고 수염이 나고 목소리 굵은 아이의 철없는 행동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은 그 흉하게 늙은(?) 아이를 낳고 기른 부모뿐이다. 아주 한심하면서도 한편으로 측은한 그의 부모뿐이다.


우울하지만 이렇게라도 금요일 오후의 피로감과 다음 주에 닥칠 과도한 업무에 대한 부담을 털어내고 신세한탄을 해 본다. 삶의 경계면을 품고 고행의 수도승처럼 생활의 달인이 되어야 하는 걸까...




놀랍게도 지금으로부터 7년 하고도 2개월이나 전에 썼던 이 글을 나는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 조금의 위안이 되는 것이 있다면, 끔찍하게 하기 싫다고 했던 것 중에 절반 정도를 내려놓았고 몹시 하고 싶은 일들 중에 또 절반 정도를 실행에 옮기고 있다는 사실이다. 아무것도 변한 것이 없다고 생각했지만 나는 조금씩 내 삶을 변화시키고 있었다. 어쩌면 앞으로 7년 정도 후에 난 완전히 새 삶을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다시 원점에 돌아가 있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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